신학 노트/교리 입문

내재하는 죄: 열매

이원범 2025. 11. 10. 22:21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죄에 관한 논의를 이어왔다. 어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이 주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연구해 나가는 것은 무척 귀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류에게 있어 가장 큰 불행이자 위협이며, 난적이기 때문이다. 죄는 인류에게 모든 불행과 저주, 죽음을 가져왔다. 이 사실만으로도 연구할 가치가 충분하다.

이미 알다시피, 내재하는 죄는 인간 안에 들어와 있는 죄다. 처음부터 들어와서 자기 안방인 듯 거주하며 주인 행세를 한다. 내재하는 죄는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작용한다. 죄가 존재하는 것은 곧 그것의 활동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죄가 있는 곳에 죄의 열매가 맺힌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하심 같이, 죄는 수고하여 일구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나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 내재하는 죄는 가만히 두어도 외부로 터져 나온다. 파괴적 결과로 말이다. 신자는 내재하는 죄가 일으키는 파괴적 결과를 어디서나 목격하고 휘말린다. 하루가 멀다고 들려오는 살인, 강도, 강간, 사기, 폭력, 뇌물, 횡령, 싸움, 마약 등 각종 범죄 사건이 내재하는 죄로 말미암은 더럽고 추악한 열매들이다. 여기서 살펴볼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종류의 죄의 열매가 아니라 신자의 삶에서 나타나는 죄의 열매다. 전자에 대해 궁금하다면 신문 보도 등을 통해 더 사실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죄의 열매를 고찰하는 데 한 가지 염두에 둘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그것을 깨닫는 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말씀을 읽고 지식을 전달받는 것만으로는 미처 알지 못하는 깊은 부분이 있으며, 누구도 모든 것을 깨달아 가르칠 수 없다. 성경은 여러 곳에 죄로 말미암은 악덕의 목록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일부 예만 적었을 따름이다. 죄의 세계는 무저갱만큼이나 깊고, 실로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광대하다. 어떤 사람에게 죄는 바로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고 마치 없는 것 같은 존재다. 그러한 반면 세상에서 가장 성자다운 사람은 이것을 깨달아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탄식한다. 죄의 열매는 셀 수 없이 많고, 하루살이는 걸러 내면서 낙타는 삼키는 것이 대부분의 현실이다.

죄의 열매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는 육체의 일, 곧 신자들이 실제 삶에 맺는 죄된 행실이며, 다른 하나는 은혜의 경향성에서 벗어나는 점진적 타락이다.

육체의 일

내재하는 죄의 열매는 육체의 일로 나타난다. 자칫 오해하면 육체가 악하다거나 육체의 소욕이 모두 잘못되었다고 여길 수 있는데 그렇지는 않다. 성경에서 '육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인간의 몸이 아닌 '죄의 오염으로 말미암은 타락한 본성'을 가리킬 때 종종 사용되었다. 육체의 본래 소욕은 악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육체의 일'은 다르다. 선악을 따질 여지 없이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다. 이것은 심령의 어두운 곳에 뿌리를 내린 나무의 가지에서 열리는 열매다. 곧 죄의 나무가 부패한 정욕을 양분 삼아 만들어 낸 행실이다. 성경은 이것의 대략적인 목록을 제시한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이것들은 오래전부터 이 땅을 가득 메운 죄의 열매들이다. 내재하는 죄는 신자의 심령에 심어져 거대한 숲을 조성한다. 이곳에 심어진 나무의 이름은 거짓과 미혹이다. 그리고 이 숲을 가로질러 정욕의 강이 흐르는데 강이 하류를 따라 흐르면서 나무마다 물을 공급한다. 강물의 원천이 마르지 않는 이상, 숲은 번성하며 때마다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다.

음행
죄의 열매로 대표적인 것은 성적인 죄악이다. 음행은 부부관계를 벗어난 육체적 관계를 말한다. 성적 관계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것이지만, 부부관계에서만 사용되도록 의도되었다. 이것은 방종하고 음란한 윤락가에서 주로 일어날 뿐 아니라, 살육과 광기가 가득한 전쟁터에서도 빠지지 않고 일어난다. 음행은 역사가 시작된 초창기부터 있었다.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실 때 땅의 거민들은 무분별한 음행을 저질렀다. 소돔과 고모라는 성 윤리가 파괴되어 동성 간의 성행위가 성행했다. 사람들이 정상적인 성관계에서 동성 간 성행위 혹은 성도착으로 변질하는 이유는 육체적 자극을 통한 쾌락이 뇌에서 오래 지속되지 않고 금방 사라지기 때문이다. 즉 같은 것을 오래 반복하면 그것에 익숙해지고 식상해져서 새로운 자극을 원하게 되는데, 이렇듯 육체는 무엇이든 금세 적응하여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유희거리에 눈을 돌린다. 그러면서 각종 성도착적 행위와 불륜, 강간, 동성애 등 갖가지 음행에 빠진다.

사도 바울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범죄하느니라"고 경고했다. 음행은 단순히 육체로 행하는 부정한 행위 이상으로 인간의 전인격을 손상하는 치명적인 결과로 찾아온다. 또 무분별한 성관계는 법에 저촉되고, 성병, 에이즈, 가정 파탄, 직무 박탈, 명예 실추, 경제적 불이익을 초래한다. 그는 이것의 대안으로 결혼을 제시했다. 몸의 욕망을 잠재우는 최선의 대책은 결혼과 건전한 부부관계이다. 또 시험에 떨어지지 않도록 몸의 욕망을 자극하는 환경을 피하는 것이 지혜다.

우상숭배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거나 우상을 숭배하거나 둘 중 하나에 속하고, 그 중간은 없다. 성경에서는 우상숭배에 관한 기록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초기에는 돌이나 나무를 깎아 만든 신상에 복을 빌고 절하는 형태였고, 이후에는 나름의 종교로 발전하였다. 오늘날에는 이런 형태의 우상숭배를 찾아보기 어려운데, 그 이유는 과거에 비해 교육 수준이 높아진 터라 그것이 합리적이지 않고 무가치하게 여겨진 까닭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의 우상숭배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우상숭배의 본질은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신처럼 모시는 대상이 없더라도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가치 있게 여기거나 애착을 느낀다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는 우상이다.

우상숭배는 신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근원적이고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돈, 권력, 향락이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더라도 이 세 가지 중 하나가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 수 있다. 사랑의 정서는 한 대상을 향해 커지면 다른 대상에 대해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정서 안에 자리한 사랑은 유동적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오늘 크다고 해서 내일도 그러할 것을 장담할 수 없다. 행위와 수고와 인내로 칭찬을 받았던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잃은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적 상황에서 행해지는 우상숭배에는 제사, 굿, 점, 사주팔자, 궁합, 운세, 불공, 이교, 사물에 소원을 비는 행위가 있다. 이 외에도 돈, 물질, 성공, 권력, 건강, 미용 등 자신이 우상이 되는 경우가 있다. 앞서 논의한 음행도 쾌락을 우상화하는 점에서 우상숭배에 가깝다.

싸움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외세의 침략을 수없이 받아왔고 지금은 남북이 나뉘어 대치 중이다. 세계도 마찬가지로 수없이 많은 전쟁을 하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 혹은 밖으로 싸우지 않더라도 안에서 분쟁하고 서로 술수를 부려 해를 입힌다. 나라 안에는 이념, 세대, 노사, 성별 갈등이 있다. 삶이 불행하고 세상이 지옥같이 변하는 이유는 바로 싸우는 습성 때문이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항상 문제가 따른다. 늘 가만히 못 있고 갈등을 일으켜 불행을 자초한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분쟁은 모두에게 불행이며 황폐하게 되는 길이다. 싸우는 나라마다 죽고, 파괴되고, 굶주리고, 주민들이 살기 위해 피난을 떠나지 않는가. 싸움은 단시간에 인명 피해를 키우고 인간을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어서 죄의 열매 중 단연 파괴력이 높다. 죄가 열매 맺는 곳에서는 전쟁과 내전이 일어나고, 범죄율이 치솟고, 교회가 분열되고, 가정이 쪼개진다. 한국 개신교에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순복음 등 많은 교파가 있다. 각 교파 내에서도 수많은 교단으로 나뉘어 있는 상황이다. 대략 교단 수가 374개라고 하니, 신자든 비신자든 누가 보더라도 납득이 가지 않는 모습이다. 이런 기현상이 벌어진 이유는 교단마다 각 원인을 두고 있으나 본질적으로 죄의 열매가 주된 요인이다. 내재하는 죄는 가는 곳마다 사고를 치고 분열하고 무너지게 만든다. 만약 이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다면, 모든 일의 근원이 되는 죄부터 밝혀서 회개를 시작해야 한다.

술 취함
한국인은 술을 정말 좋아한다. 대학가를 보면 학문과 어울리지 않는 술집과 유흥업소가 즐비하고, 손님들 역시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온 학생들이 많다. 사회생활을 시작해서도 술을 접할 기회가 많다. 직장을 잘 다니려면 회식자리나 혹은 접대를 위해 술을 마시지 않으면 곤란하다. 한국 사회는 술을 애호하는 사람들로 인해 술에 관대한 분위기라고 할 수 있다. '주취감형'이라고 해서 술을 마시고 저지른 죄에 대해 형벌을 감하는 것이 형법에 명시되어 있을 정도다. 일각에서는 비판 여론이 나오는데 이는 당연한 일이다.

성경에서 언급한 술은 모두 포도주를 가리킨다. 물이 귀한 환경에서 포도주를 음료로 활용한 것은 삶과 생존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었기에, 성경은 술을 금하지 않는다. 대신 술 취하지 말라고 하였고, 술 취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초점이 술이 아니라 술 취함에 있는 것이다. 술은 적당히 마시면 기분을 좋게 하지만, 취한 후부터 방탕함과 온갖 폐해를 불러온다. 술 취함은 독소로 인해 몸에 부담을 주고 정신을 혼미케 한다. 자제력을 저하시켜 내재하는 죄가 열매를 맺도록 길을 연다. 이때 그는 취기와 더불어 죄의 역사로 말미암은 갖가지 충동에 휩싸이고, 부족한 자제력으로 인해 그것을 실행하면서 시비, 다툼, 성추행, 고성방가, 음주운전 등 범죄와 사회 문제를 일으킨다.

점진적 타락

내재하는 죄는 신자가 유혹을 완강하게 버틸 경우 장기전으로 전환한다. 장기전이야말로 죄가 지닌 강점 중 하나이다. 죄는 지치지 않고, 다른 일을 하지 않고, 목적이 변하지 않는다. 그에 비해 인간은 장기전에서 약하다. 젊은 시절에 보잘것없고 역경과 고난이 따를 때에는 겸손히 하나님을 바라보다가 나이가 들어서 삶이 안정되고 부귀영화를 손에 쥐면서 서서히 바뀌다가 어느새 타락하는 것이다. 이런 예는 신자들 사이에서 수없이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자조차 거룩한 길에서 벗어나 쇠락의 길을 걷도록 역사한다. 그 과정이 빠른 것이 아니라 매우 천천히 진행되어 거의 알아채기가 어렵다. 마치 아무 증상이 없이 지내다가, 어느 날 몸이 좋지 않아서 병원에 가보니 말기 암 진단을 받은 것과 같다. 내재하는 죄는 신자가 죄에 대한 방비를 계속하더라도 마치 지계석을 옮기듯이 영역을 넓혀가며 서서히 주도권을 잡아간다.

사랑의 식어짐
타락이 진행되는 동안 신자의 내면에 생기는 변화는 사랑의 식어짐이다. 처음 회심했을 때 심령에서는 생수의 강물이 터지듯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이 솟아난다. 하나님의 은혜가 생수처럼 부어져 삶에 큰 변화가 나타난다. 그동안 죄는 숨죽여 때를 기다린다.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기회마다 역사하여 판도를 뒤집으려 한다. 풍성한 은혜의 상태를 평생 유지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삶 속에서 계속 죄를 짓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혜가 한결같이 임하더라도 내재하는 죄는 은혜의 반대급부로서 꾸준히 죄의 열매를 맺는다. 에베소 교회의 사례에서 그들은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 이유는 설명하지 않지만, 원인을 제공하는 것은 항상 죄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사랑은 은혜의 원리가 강성할 때 맺을 수 있는 열매다. 반면에 사랑이 식는 것은 죄의 원리가 강성함을 나타낸다. 죄는 비록 작은 것이라도 은혜가 흐르는 관을 더럽혀 공급을 막고 사랑이 식게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으면 영적 의무를 소홀히 하게 되고 곧 은혜의 고갈로 영적 침체가 일어난다. 이어서 불법이 성하게 되는 악순환에 빠진다.

배교
신자라도 시험에 들면 믿음의 쇠퇴가 일어나는데 성령께서 그를 놓지 않으시면 언젠가 회개하고 돌아온다.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믿음에서 떠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을 배교라고 한다. 실제로 신자 중에는 은혜의 빛을 받고, 영적 은사를 소유하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므로 다양한 체험을 하고도 믿음에서 떨어지는 사람이 있다. 잠시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전에 믿었던 것을 부인하고 거짓된 가르침을 받아들인다. 배교는 진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을 잃고 신앙을 버리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신자가 그런 극단에 이르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지만, 아주 적은 비율로 구원이 불가능할 정도의 심각한 타락에 이르러 멸망에 넘겨지는 일이 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이 부분은 아마도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흔히 설교나 강의를 통해서 한 번 획득한 구원은 결코 잃을 수 없다고 배웠을 테니 말이다. 아무리 신자가 타락을 해도 하나님은 그를 놓치지 않고 회개케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고 배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성경 구절이 적지 않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배교의 위험을 경고하면서 구원을 잃어버릴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성경은 신학자들이 주장한 두 견해를 모두 지지하는 셈이다. 따라서 어느 한 쪽을 따른다고 해서 반대 입장을 폄하하고 이단으로 정죄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말뿐이 아니라 선한 행실로 믿음의 진보를 이뤄가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무엇이든 스스로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은혜 가운데 있을 때는 그럴 리 없지만, 거듭된 불순종과 타락으로 죄의 지배에 들어가면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자가 될 수 있다. 어느 입장을 추구하든 모두 같은 목적을 향해 나아감을 인식하고 부족함을 채우려는 자세가 바람직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