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노트/교리 입문

내재하는 죄: 활동

이원범 2025. 11. 10. 22:20

죄에 관한 논의를 이어가는 것은 죄의 활동을 알고 그것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죄는 이 시간에도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며 공격할 틈을 노린다. 이를 인정하든 안 하든 자유지만, 인간은 언제든 죄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모르면 모르는 만큼 공격을 허용하고, 깨닫지 못하는 중에 소중한 삶을 유린당한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의 지배하에 괴로운 인생을 사는지 모른다. 죄는 신자의 최대 원수이자 매우 까다로운 적이다. 평소에는 이곳저곳을 바쁘게 다니며 분탕을 쳐놓지만 잡으려고 하면 이리저리 피하고 깊은 곳에 숨어버린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을 남기지 않는 지능형 범죄자와 같다. 예로부터 내부의 적이 무섭다는 말이 있다. 죄는 내부에서 비밀 정보를 습득하고, 상황을 읽을 줄 알며, 사냥꾼처럼 끈질기고, 저격수처럼 때를 노릴 줄 안다. 인간 내면에 깊숙이 숨어 있다가 틈을 노려 치명상을 입히는 암살자 같다. 뱀은 형체가 있으나, 죄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확연히 눈에 보이며 형태나 크기와 더불어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여기서는 마음에서 잉태하여 사람들의 삶 속에 실제로 실행된 죄들을 중점적으로 살피며, 역으로 내재하는 죄의 활동을 추적해 보려고 한다.

이성을 속임

인간의 이성은 지도적 역할을 하는 영혼의 기능으로서, 죄가 구체적 형태로 마음에 침투해 들어올 때 그것을 제지하고 통제한다. 이를테면 죄가 실제 삶에서 발현되기 전에 거치는 관문 혹은 국경 너머를 살피는 초소로 여길 수 있다. 다행히도 이성은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 항상 작동한다. 지나치게 흥분하면 이성을 잃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순간에도 이성은 작동을 멈추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죄는 깨어있는 이성을 상대로 다양한 수단으로 침투하려 한다. 만약 이성의 관문을 통과한다면 죄는 감정과 의지에 다가갈 방편을 얻게 되고 우세해질 가능성이 열린다. 이처럼 이성은 영혼의 다른 기능을 지키는 역할을 하기에, 죄는 우선적으로 이성을 현혹한다.

무지를 최대한 이용한다
죄는 항상 이성의 감시를 받을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이성이 죄를 구별할 수 있느냐이다. 도둑이 오는지 항상 지키고 있다고 모든 도둑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다가와 빌린다는 명목으로 가져가 안 갚기도 한다. 그런 사람은 친구라는 가면을 썼지만 결국은 도둑이다. 마찬가지로 죄는 도둑이다. 그러나 가면을 쓰고 죄가 아닌 척한다. 따라서 가면을 쓰고 오는 죄를 가려내려면 무엇보다 진리를 아는 지식이 필요하다. 죄에 대한 인식은 진리의 빛 아래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앞서 비신자는 죄와 싸움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그 이유가 이것이다. 인간은 양심의 도움으로 자연 상태에서도 죄를 감지하지만, 죄의 본질에 도달하려면 율법과 성령의 빛을 통해야 한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이같이 탄식하셨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하게 된 것이 바른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죄는 무지 가운데 최대의 힘을 발휘한다. 죄를 가려내지 못하는 이성은 깨어있을지라도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그래서 신자에게도 죄가 극성을 부릴 수 있다. 진리를 알더라도 미진한 부분이 있고, 잘못 아는 경우도 있어서이다. 그리고 자주 묵상하지 않으면 원수가 와서 망각하게 한다. 이때 이성은 어두운 안개에 휩싸여 보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죄가 들어올 기회를 허용한다. 죄는 무지를 최대한 이용하여 인간을 유혹하고 농락하기 때문에 신자는 말씀을 가까이하고 묵상하기에 힘써 무지에서 벗어나야 한다.

불만의 생각을 넣는다
죄는 신자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불만의 생각을 넣는다. 이는 하나님과의 사이에 틈을 벌리려는 죄의 간계이다. 이 계략은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출애굽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활용되었고, 지금도 대체제가 필요 없는 이 방면에 최고의 수단이다. 인간은 의식주와 더불어 자기실현의 욕구를 가진 까닭에 이를 충족하고자 하며, 혹여 충족이 안 되면 본능적으로 위기의식을 느낀다. 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불만족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림으로써 하나님을 원망하는 생각을 일으킨다. 이로 인해 신자는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미워하거나 혹여 망하게 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고민한다. 때론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나만 홀대하고, 나만 복을 안 준다고 느끼며 울분을 터트린다. 불평과 원망은 믿음의 시각을 갖지 못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불행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가 된다. 따라서 하나님을 심히 진노하시게 하는 잘못이다. 죄는 이러한 점을 알고 신자에게 불만을 심는다.

약점을 노린다
세상에 존재하는 죄는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다양하다. 모두 내재하는 죄가 만들어낸 결과다. 죄는 인간을 죄짓게 만드는 막대한 역량을 지녔다. 그 힘과 실행력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다양한 죄를 끌어내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죄가 인간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으며 시간, 환경 등 요소를 고려하므로 가능한 일이다. 한마디로 상당히 지능적인 상대라는 말이고, 거의 쉼 없이 일을 하는 지구력과 부지런함을 가지고 있기까지 하다. 성경에는 죄에 대한 인간의 연약함을 강조하는 내용이 더러 등장하는데 이를 뒤집어 생각하면 그만큼 죄가 인간을 상대함에 있어서 유능하다고 여길 수 있다.

죄는 신자의 약한 점을 노린다. 무지하다면 무지를 이용하고 불만이 있으면 그것을 빌미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간한다. 과거의 두려운 기억이 있으면 어느 순간 그 기억을 꺼내어 괴롭힌다. 출애굽 백성이 홍해 앞에 진을 쳤을 때 그들은 애굽 군대가 쫓고 있다는 소식에 두려워하며 울고 소리를 질렀다. 이 배경에는 과거 애굽에서 당한 학대와 폭정의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겪은 두려움은 나쁜 기억을 이용한 죄의 역사와 관련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공황장애를 가진 사람이 공황에 빠지고, 우울증을 가진 사람이 우울한 생각에 빠지는 이유가 이것이다.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으면 그것이 그에게 약점이다. 죄는 그것을 집중적으로 공략하여 위축시키고, 우울, 분노, 불안, 불평, 성형 중독 등 갖가지 죄를 일으킨다. 그밖에, 정직하게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에게 불의한 재물을 탐하게 하고, 건장한 남성에게 자신의 힘에 취해 만용을 부리게 하고, 젊고 미혼인 남녀에게 외로움을 빌미로 색욕에 빠지게 만든다. 바울은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고 조언하였는데 그만큼 약점을 극복하기란 쉽지 않다. 비유하자면 마음이 성채라고 할 때 높이가 낮은 벽, 금이 갔거나 틈이 벌어진 곳이 약점이다. 성벽에 그런 약점이 있으면 적이 공략하기 쉬운 것처럼, 죄는 언제나 인간의 약점을 노린다.

보상을 제시한다
죄의 힘과 위험성은 이성이 죄로 여기더라도 죄를 짓도록 강요하는 데 있다. 그것은 죄의 장기인 거짓과 속임에서 나온다. 신자들이 죄가 죄인 줄 알면서도 거절하지 못하는 이유는 죄가 주는 보상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을 행하기 전 죄가 제시하는 보상을 얻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죄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허용하는 것이다. 내재하는 죄는 누구나 거절할 어설픈 제안을 하는 협상의 초보가 아니다. 어설픈 제안이 신자에게 통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뱀은 하와에게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속였고, 사탄은 예수님께 내게 절하면 천하만국을 주리라고 유혹했다. 죄는 비록 거짓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정말 바라는 것을 주리라고 약속한다. 부, 명예, 쾌락을 약속하고 눈에 뻔히 죄로 보이는 것을 신자에게 강요한다. 예로부터 인간은 더 많은 부를 얻기 위해 싸웠다. 죽이고 빼앗고, 속이고 빼앗고, 자기 유익을 위해 친우조차 배신하고, 죄의 낙을 사랑하여 죄에서 못 벗어나는 것이 현실이다. 분명한 사실은 죄가 제안하는 보상은 실제보다 부풀려진 것이다. 결코 죄짓기 전에 제안했던 만큼의 보상을 주지 않는다. 하나님을 거역하면서까지, 내 영혼의 해악을 담보로 그것을 실행하였음에도 얻는 보상은 초라하고 허무한 것들이다.

사실을 은폐·왜곡한다
사람들은 누군가 간섭하고 잔소리하는 말을 듣기 싫어한다. 자신을 억압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감사히 여겨야 할 행동이다. 잠언 기자는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고 하며, "훈계 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고 하였다. 이에 반해, 죄는 신자의 잘못된 행동을 제지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신자가 치러야 할 불이익에 대해 경고하지 않는다. 이것이 너무 당연한 이유는 신자의 영혼이 죄로 말미암아 멸망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기 때문이다. 뱀은 하와를 유혹할 때 그녀가 처한 상황과 위험을 경고하지 않았다. 그녀가 얻을 만족, 실과의 탐스러운 측면만을 강조했다. 하와가 그 열매를 먹으므로 이어질 결과를 상기하자, 먹어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속였다. 위험 사항을 은폐하더니 다음에는 사실을 왜곡했다. 죄는 잉태한 죄가 이성의 제지를 받지 않고 출산하도록 사실을 은폐·왜곡한다. 죄의 기만성은 신자가 죄의 위험성을 깨닫지 못하도록 중요한 사실을 숨기는 데 있다. 사기꾼은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을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가 신자에게 죄를 지은 후의 일을 말할 것으로 안다면 적에게 자비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죄에 따른 결과와 그 위험성은 지성이 거절할 요소이기 때문에 철저히 비밀로 한다.

은혜를 오해하게 한다
죄는 신자가 하나님의 성품과 은혜를 오해하게 하여 죄를 짓더라도 그냥 넘어가 주실 것을 믿게 만든다. 큰 죄라면 모르지만 작은 죄에 한해서는 충분히 간과하시리라 여기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속임 가운데, 신자는 죄와 적당히 타협하면서 이대로 살아도 괜찮을 것이라는 기대로 살아간다. 그러나 이것은 은혜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속은 자들은 작은 죄를 눈감아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올바른 생각이 아니다. 만약 부모에게 큰 불효를 저지르고 나중에 잘못을 깨달았지만,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니 이미 용서하셨겠지라고 여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잘못에 대한 부분은 서로 다르다. 하나님이 은혜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은, 신자가 죄를 자복하고 용서를 구할 때 그 죄를 용서해 주시니 은혜인 것이다. 회개하지 않고 용서되었을 것으로 여기는 것은 은혜를 오해하는 것이다. 죄는 이렇게 은혜의 교리를 왜곡시켜 멸망에 대한 확실한 안전장치를 마련한 뒤, 신자에게 죄를 짓도록 유혹한다. 물론 은혜를 오해하지 않더라도, 인간인 이상 죄를 안 지을 수 없다. 그리고 죄가 없는 완전한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복음의 은총을 입고 거듭나면 죄에 민감하며 죄를 멀리한다. 지은 죄를 가슴 아파하며 통회하는 심령으로 회개한다. 은혜의 성령님은 우리에게 회개의 영을 부어주시고 회개할 죄를 가르쳐주신다.

정서를 미혹

인간의 정서는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것을 보고 즉각적으로 좋거나 싫거나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감정을 느끼고, 생활하며 어떤 일에 기뻐하고, 그 반대 일에 슬퍼한다. 이 밖에도 다양한 감정이 있으며 이를 표현하는 것은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다. 정서는 인간 본성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다양한 감정 표현을 가능케 하고,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좋은지 싫은지 표현을 안 하고 항상 무표정으로 일관한다면 로봇이 아니냐는 오해를 살 것이다. 또한 행동과 계획의 원천으로서, 현재 우리가 바라보는 것처럼 인간 사회를 다채롭고 진취적으로 이루게 한다. 이러한 까닭에 정서는 내재하는 죄가 활개치는 전장과 다름없다. 아직 이성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어린아이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죄의 역사는 정서 안에 여러 감정과 욕구로 나타난다. 죄는 우선적으로 정서를 혼란시키고 신자가 충동적인 격동 속에서 헤매게 만든다.

세상을 사랑하게 한다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높이고 경배하는 데서 기뻐하도록 지음받았다. 정서의 대부분이 사랑의 정서로 이루어진 것이 그 이유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진정한 만족감을 누린다. 다른 것을 사랑해서는 아무리 충족시키려 해도 끝없는 갈증을 느낄 따름이다. 정서 안에서 사랑을 지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뿐만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다양한 정서가 파생한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맡은 일을 수행하면서 만족하고,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였다. 미움의 정서는 하나님께서 선하시므로 악을 미워하는 데서 나온다. 죄는 정서에 혼란을 주려고 역사하는데 그 일환으로 사랑의 대상을 바꾸려 한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죄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신자에게 강요하는 대상은 세상이다. 세상은 사탄이 지배하는 장차 멸망할 나라이다. 멸망할 죄가 가득한 이 장소는 이 방면에서 내재하는 죄보다 주도적으로 역할을 한다. 이곳은 하나님을 대체할 사랑의 대상이 넘치는 곳이다. 육신을 만족하게 하는 욕망을 발산시킬 장소다. 죄는 보잘것없던 세상을 매력적인 장소로 바꾸기 위한 큰 그림을 그리고, 인간 안에 소원을 두고 영감을 베풀면서 역사했다. 지금의 향락적 세상은 과거 죄가 꿈꾸었고 노력하며 조성한 모습을 띠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사도 요한은 직설적으로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사랑은 한 방향으로 마음이 기울게 하므로 동시에 여러 대상을 사랑할 수 없다. 물체가 한 번에 두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듯이 말이다.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 쪽으로 마음이 끌리면 하나님과는 자연스레 멀어진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고 가르치셨다. 이를 잘 아는 원수는 신자가 아버지의 사랑에서 멀어지도록 세상으로 유혹한다.

원초적 욕망을 자극한다
죄가 정서를 미혹하는 데 주로 이용하는 통로는 육신의 원초적 욕망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가졌고 가장 기본적인 것이기에 피해 갈 사람이 없다. 인류가 지은 최초의 죄 역시 뱀의 교활한 거짓이 유효했지만,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운 열매를 향한 열망이 부가적으로 힘을 더했다. 인간은 본래 영과 육이 조화를 이루는 존재였다. 비록 발이 지상에 닿아 있었지만, 영의 세계를 직접 보고 만지기도 하며 영이신 하나님과 제약 없이 교제할 수 있었다. 이 점이 본래 인간과 타락 후 인간의 결정적인 차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인지하는 감각은 본래 인간의 절반 이하 수준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것이 단순히 수치상의 차이가 아닐 것이라는 의문은, 타락 후 벌거벗은 수치를 깨달은 장면에서 생겨난다.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은 것은 그들이 지음 받은 때부터이다. 쭉 옷을 안 입고 살았던 것이다. 타락으로 인해 생겨난 변화 두 가지는 전에 논의한 바 있는 오염과 영의 감각 상실이다. 하나님을 닮아 거룩한 광채로 빛나던 두 사람은 죄로 오염되는 순간 빛을 잃었다. 광채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였고 옷처럼 육신을 덮었다. 옷을 안 입었다곤 하지만 육신이 드러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죄는 그 빛을 앗아갔고, 두 번째로 영의 세계와 소통할 수 있게 하는 감각을 차단했다. 영적 존재임에도 영의 감각을 갖지 못하게 하고 영의 세계와 분리되게 하였다.

머지않아 인간 사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떠나 그대로 존속하기 어려울 만큼 타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리신 결단은 홍수로 악인을 쓸어버리고 인간의 긴 수명을 단축하는 것이었다. 창세기 기자는 하나님을 떠나 죄와 결탁한 자들을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고 설명했다. 영과 육 양쪽으로 감각을 유지하던 것이 이제 육신으로만 감각을 가지므로 육의 감각은 전보다 더욱 예민하게 되었다. 영의 감각으로 하나님과 소통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는 데서 오는 감격과 기쁨을 누리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므로 말미암아 그 상실한 것을 육신적 쾌락과 애욕을 추구함으로 얻도록 바뀌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죄는 세상에 있는 것을 동원해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자극한다. 이로 인해 인간의 본성은 영적인 활동보다 육신이 필요로 하는 것에 치우치고, 육신은 눈에 보이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마음의 생각과 의지를 강제한다. 또한 살면서 지상의 삶에서 누리는 영예와 권세를 자랑하게 한다. 이것들이 주는 만족과 즐거움은 한계가 있고 장차 사라질 것인데, 우리는 지금도 유혹을 받으며 많은 부분 종속되어 있다.

부정적 감정을 증폭한다
죄는 인간의 정서에 어떤 형태로든 나타날 수 있다. 그렇지만 객관적으로 그것이 역사하는 것을 인지하기 어려운데 그 이유는 앞서 살핀 바 있는 죄의 속성과도 관련이 있다. 그는 정체가 드러나길 원치 않기 때문에 신자가 이상하다고 느낄 과도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따라서 없는 감정을 갑자기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감정을 맹렬히 키우는 식으로 신자의 의심을 피한다. 이는 자신의 감정이 어디까지인지 정확히 모르는 점을 노린 죄의 기만술이다. 죄가 감정을 증폭하는 유형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불시에 크게 키운다. 이성에게 충분히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급하게 휘몰아쳐 의지를 압박한다. 이렇게 되면 일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급하고 경솔한 행위를 저지르게 된다. 간간이 접하는 소식 중에 '분노조절장애'라고 하여 화를 주체하지 못해 흉기를 휘두르는 사건이 생기는데 그것이 이 유형에 해당한다. 포악한 감정의 증폭은 폭주하는 열차처럼 방해하는 것을 모두 들이받고 다치게 만든다. 대신 그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과하지 않지만 오래 지속되게 한다. 죄는 감정을 미혹해 여러 번에 걸쳐 은근한 충동을 부추김으로써 서서히 의지의 동의를 얻어내는 방법을 사용한다. 요셉이 형들에 의해 애굽에 팔린 사건에서 요셉이 형들의 감정을 상하게 한 것은 사실이나 가족 간에 그런 일은 늘 있는 일이고 하루가 지나기 전에 풀리는 것이 정상이다. 따라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은 분한 감정을 증폭시키는 죄의 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증오심은 점차 증폭되어 마침내 그를 살해할 결심을 품게 했다. 증오심과 질투심이 점차 쌓여가면서 마침내 살의가 일어난 것이다. 본래 화는 시간이 지나면 누그러져야 하는데, 잊을 만하면 떠올려 분한 감정을 자극하는 식이다. 마치 화로의 불씨가 사그라지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땔감을 넣어 살아나게 하는 것과 같다.

죄는 두 가지 유형을 혼용하거나 번갈아 활용해 우리 영혼을 농락한다. 인생의 불행은 증폭된 감정으로부터 시작한다. 주체하지 못한 감정과 과욕은 화를 불러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해하고, 소중한 것을 빼앗고, 관계를 파괴하고, 쌓아 올린 명성을 무너뜨리고, 실패자로 낙인찍는다. 하나님을 대대로 섬긴 야곱 일가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죄의 역사를 모르고 그에 대비하지 못함에 있다. 그들을 지금 우리와 비교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당시에는 성경이 없었고 죄의 역사에 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안다고 해서 공격이 약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싸우려면 적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했다. 분은 인간이 가진 감정 중 하나인데, 죄는 이것을 기초로 화를 참지 못하게 하고 싸우게 만든다. 신자는 어떤 감정이든 그것이 상황에 꼭 들어맞는 감정이라도 주의해야 한다.

의지를 설득

의지는 선택이나 행위를 결정하는 원리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의지의 결정을 통해 선하거나 악한 행동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실행된 죄는 명백히 의지의 동의로 이뤄지는 것이다. 가히 인간의 본성 안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며, 죄의 입장에서는 마지막으로 통과해야 할 관문이다. 내재하는 죄는 의지에 관여할 권한이 없다. 그래서 이성과 정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영향이 미미하다. 인간이 의지에 대해 가진 권한은 무척 강한 것이다. 이것은 죄가 무슨 수를 쓰든 강탈할 수 없다. 죄는 아무리 강해도 의지의 1할도 차지할 수 없다. 다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집요함을 보인다. 고지를 눈앞에 둔 등산가처럼 남은 힘을 끌어내어 의지를 설득한다. 예수님 당시 대적자들이 사형 집행을 위한 법적 권한을 가지지 못했음에도 집권자인 빌라도의 관저에 모여 그를 압박하므로 예수님의 십자가형이 정해졌다. 마찬가지로 죄도 의지에 직접적인 권한은 없지만 미혹된 정서로 간접적으로 압박을 가하여 의지가 움직이게 만든다.

문에 엎드려 있는다
죄를 미워하는 신자들은 습관적으로 저지르는 추악한 죄악에 스스로 실망하고 괴로워한다. 다윗은 자신과 죽음 사이가 한 걸음뿐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신자와 죄 사이가 그렇다. 죄는 신자와 무척 가까이에 있다. 동생 아벨에 대한 시기심으로 살의에 잠식된 가인에게 하나님은 이같이 말씀하셨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마음에서 죄의 자리는 늘 문 앞이다. 이 말은 문만 열면 즉시 죄가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은 당연하게도 의지의 동의를 말한다. 죄는 이미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다. 마치 온라인으로 클릭 몇 번을 하면 주문한 물건이 집으로 배송되는 것처럼 죄는 신자에게 마지막 단계의 동의만을 요구한다. 물론 동의했다고 끝은 아니다. 거절했어도 동일하다. 결코 멀리 떠나지 않고, 마음 한편에서 문이 열리길 기다리며 엎드려 있는다.

은혜의 법을 대적한다
신자의 마음에는 두 원리가 공존한다. 하나는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은혜의 법이다. 이로써 신자는 선을 행하기 원하는 의지 곧 영적으로 선한 것을 실천하려는 경향적인 기질과 성향을 가진다. 다른 하나는 죄의 법으로서, 영적으로 선한 일을 하도록 의지를 이끄는 은혜의 원리에 맞서 선한 것에 대해 적의를 품고 의지를 악으로 이끄는 원리가 작용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은혜와 죄는 신자 안에 거하면서 서로 주도적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대립한다. 두 원리는 한 사람 안에 거할 수 있지만, 동시에 한 영혼을 지배할 수 없다. 왕좌는 오직 하나며, 오직 한 지배자만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 사람 안에 성령이 주도하시는 은혜의 법이 없다면 갈등과 대립이 벌어지지 않는다. 마음 안에 그를 대적할 상대가 없으므로, 죄는 누구도 견제하지 않는 절대 권력을 쥐고 홀로 왕 노릇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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