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는 죄를 미워하고 죄에 빠지길 원하지 않는 사람이다. 비록 과거에 종이었으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신자의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주님께서 핏값으로 사신 바 되어 그의 소유요 백성이다. 그러므로 다시 과거로 돌아가 죄에게 종노릇할 수 없다. 죄 죽임은 많은 신자에게 생소하게 느껴질 것이다. 죄에서 이미 해방되었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냐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틀린 이야기다. 신자는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로 인해 마음에 새로운 법이 새겨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지만 죄가 여전히 잔재한다. 만약 중생의 역사로 죄가 다 사라졌다고 한다면, 성령께서 하실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성령 없이도 거룩하게 살 수 있으니 말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신자에게 죄 죽임은 지극히 일반적인 과업이다. 내재하는 죄는 지옥에서 파견하고 지원하는 무장 단체이다. 간교하고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해 무방비한 영혼을 사로잡아 끌고 간다. 만약 그것에 붙잡혀 끌려가면 다시는 나오지 못하는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진다. 이 무법자들은 영혼을 파괴하는 저주스럽고 수치스러운 열매를 맺게 한다. 이따금 신자는 죄의 존재를 잊고 너무도 쉽게 죄의 수렁에 빠진다. 죄를 대적하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방치한다. 자신의 영혼이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저속한 삶을 살아가고, 허탄한 것에 빠져 자신의 영혼을 파멸로 끌고 간다. 죄를 죽이지 않으면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처럼 성장을 이룰 수 없다. 죄의 가시는 자라서 생명의 기운을 막고 영혼이 자라지 못하게 한다. 영혼이 잘 자라는 환경을 만들려면 땅을 기경해서 가시덤불을 쳐내야 한다.
죄 죽임의 의미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에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지시가 나온다. 주의 종과 신자에게 싸움은 거리가 먼 것이지만, 그는 특별히 '싸움'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영혼은 이 땅에 올 때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 안에서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보내진다.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예수님의 비유에서 종들은 주인에게 받은 돈으로 사업을 하게 되었다. 목표는 받은 것 이상의 수익을 남기는 것이다. 사업 수완이 좋든 나쁘든 따질 문제가 아니다. 가진 자금을 지혜롭게 써서 수익을 남겨야 한다. 이 비유에서 배울 교훈은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마땅히 수행할 일이 있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신자는 경기하는 자이며 목적은 이기는 것이다.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신자에게 부과된 의무다. 이 싸움은 흑암의 권세로부터 완전한 해방, 영혼의 자유를 얻기 위한 몸부림이다. 이렇듯 죄 죽임은 믿음의 싸움이며, 구원을 이루기 위해 참여하는 경기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지속적인 투쟁을 벌여 내재하는 죄의 경향성을 약화하는 것이다. 곧 육신이 즐겨 행하는 죄악(악습)을 없애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의심, 불안, 혈기 등 여러 부정적 감정을 원만하게 해소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죄 죽임의 수단
죄 죽임은 신자의 특별한 의무다. 죄 죽임을 일상의 의무로 여기지 않으면 죄의 파괴적 열매에 의해 영혼이 죽을 수 있다. 하지만 죄의 경향성은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옛날부터 죄를 죽이려는 노력은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났다. 철학자들은 저속한 쾌락을 경멸하고 훈련에 의한 극기를 통해 과도한 감정과 욕망을 정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삶에서 자신의 원칙을 지키지 못했다. 과거 수도사들은 은둔 생활을 하며 매일 수차례 미사를 드렸고 행동, 감정, 대화를 제한하는 엄격한 규율을 따랐다. 그뿐만 아니라 채찍으로 몸을 때리고, 금식하고, 죄 용서를 구하며 무릎으로 계단을 올랐다. 이들은 욕망이 들끓는 육체를 다스리기 위해 고통을 무릅쓰고 육체를 학대했다. 이렇게까지 함으로써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려고 했다.
육체의 행실은 내재하는 죄로부터 나온다. 정욕의 강이 흘러 나무에 죄의 열매가 맺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을 억압하는 방법으로는 죄의 진전을 막을 수 없다. 그것은 강에 둑을 세워 흐름을 억지로 막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강구한다면 강의 수원이 마르게 해야 한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이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성령의 은혜는 죄의 원리를 거스르는 유일한 힘이다. 죄가 영혼을 유혹해 육신의 파괴적인 열매를 맺게 하는 반면, 성령은 신자의 마음을 감화해 은혜 안에서 거룩한 열매를 맺게 하신다. 따라서 성령의 능력이 죄를 죽이는 유일한 수단이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죄를 죽일 수 없다. 다른 수단은 무익하다. 오직 성령만이 죄와 육체의 지배를 이기게 한다.
죄 죽임의 자세
많은 신자가 자기가 진 짐이 무겁다고 하지만 신자 중에 신앙생활을 쉽게 하는 사람은 없다. 성경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각자 절박함 가운데서 죄와 투쟁을 벌이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것으로부터 배우는 교훈은 신자를 멸망에 빠뜨리는 죄의 힘이 얼마나 크고, 또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 얼마나 큰 희생을 치러야 하는가이다. 신자 안에 들어와 있는 부패는 강한 자이며, 끈질기고 지독하다.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는 오른눈이 너로 죄짓게 하면 뽑아버리고 오른손이 죄짓게 하면 찍어버리라는 말씀이 있다. 이는 실제로 그리하라는 뜻은 아니지만 죄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호소하는 표현이다. 죄 죽임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확고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과 싸워서 승리하리라는 각오를 다져야 한다.
깨어있어야 한다
죄와 신자 간의 싸움은 공정한 룰에 입각한 경기가 아니다. 불리한 점은 신자가 다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죄가 신자의 내면을 들여다본다면 신자도 그리해야 하고, 죄가 모든 비밀을 파악하고 있다면 신자도 그래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함을 모두가 안다. 이것은 공정한 싸움이 아니다. 또한 여유를 가지기 어렵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죄는 배고픈 사자처럼 난폭하고 저돌적이다. 먹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의 각오로 사냥하듯, 죄도 집요하게 공격한다. 그래서 신자는 그 존재를 분명히 인식하게 된다.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해서 그렇지 끊임없이 악한 일을 준비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우리가 아는, 믿음의 거장들이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깨어 경계하지 못해서 넘어진 일이 많음을 꼭 유념해야 한다. 제아무리 강한 장수라도 불시에 기습을 당하면 당해낼 수 없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바울은 최상위의 영적 수준에 도달하고도 자신에 대해 부족하게 평했다. 우리는 영적·도덕적 완전함에 있어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구원의 결과를 미리 단정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믿음의 싸움은 끝날이 오기까지 끝이 아니다. 죄와 싸움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죄의 반격에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죄가 사라졌다고 여기는 때라도 미처 알지 못하는 곳에 죄의 잔당이 남아 있다. '적이 없다', '죽었다', '승리했다'는 생각부터가 잘못이다. 한평생 죄와 싸우는 것 외에 다른 가능성을 열어두지 말아야 한다.
초반에 물리쳐라
믿음의 싸움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신자와 죄의 주도권 다툼이다. 전쟁은 자원이 있어야 싸울 수 있고 무기, 병사, 각종 군수물자가 자원이다. 싸움은 양쪽 모두에게 피해를 주고 자원을 소모하는데 이긴 쪽보다 진 쪽의 소모가 크다. 이를테면 죄짓는 것은 크고 작은 싸움에서 패하는 것이다. 작은 싸움은 전체에 중대한 영향을 주지 않지만 작은 손실이 모여서 전세에 영향을 미친다. 죄를 지을수록 아군 손실과 적군의 우세로 죄의 힘이 더 커지고, 결과적으로 그 사람에게서 죄의 경향성이 더욱 짙게 나타난다. 그러나 금방 그 차이가 드러나지 않아서 간과하는 부분이다. 이해가 쉽도록 극단적인 예를 들면, 갓 출생한 아기와 방금 교도소에서 출소한 성인이 있다. 둘 중 누가 더 악에 익숙할지는 고민해 볼 필요조차 없다. 죄성에 있어서 나이가 가져오는 변화는 강화와 약화 혹은 유지다. 전투에서 자주 패하면 죄성이 강화되고, 자주 이기면 죄성이 약화된다. 유지는 가능성 측면에서 그럴 수 있다는 것이지 흔한 경우는 아니다.
죄와 싸울 때 취해야 할 조치는 죄가 시작될 때, 곧 죄가 초반에 움직이고 활동할 때 단호히 물리치는 것이다. 어떤 죄나 부패한 소욕이 사방을 포위하고 공세를 준비할 때 화살을 날려 그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성벽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직접적인 피해를 보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공격에 집중할 수 있다. 만약 방심해서 적이 성벽을 타고 올라오면 화살로 대치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피해와 손실을 볼 것이다.
그날의 잘못을 그날 회개한다
죄 죽임은 전쟁이다. 전쟁을 치르는 데는 엄청난 돈과 자원이 든다. 전쟁하는 국가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경제 활동에 큰 제약을 받는데 들어가는 돈과 물자가 막대하니 당연히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서로 공격을 주고받으면서 국가의 중요 시설이 파괴된다. 이것은 당장에 필요한 여러 기능을 마비시켜 전쟁을 지속할 동력을 잃게 한다. 패배한 쪽은 광범위한 피해로 인해 전쟁을 끝내고도 오랜 침체와 불황을 겪기 마련이다. 믿음의 싸움에서도 마찬가지다. 믿음의 싸움에서 소요되는 자원은 은혜다. 은혜 없이 죄와 싸우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처럼 무력할 따름이다. 신자는 죄와 싸우면서 은혜를 소모한다. 싸움은 끝나지 않으니, 은혜를 계속 공급받아야 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죄는 은혜가 담긴 그릇을 공격하여 깨진 곳으로 은혜가 새어 나가게 만든다. 은혜를 부어도 모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그릇이 깨진 신자는 은혜의 고갈로 더 이상 싸울 수 없다. 깨진 그릇은 율법 준수와 종교적 의식을 각별히 수행하여도 회복되지 않는다. 싸울 수 없는 상태에서 그들은 죄의 포로일 수밖에 없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예수님을 배척한 유대인들이 그러했다. 은혜가 충만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도 은혜를 받지 못했다. 무늬만 신자인 죄의 포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죄의 낙을 더 사랑한다. 대적자들은 예수님의 표적과 행적을 깎아내리고, 그가 귀신 들렸다고 조롱했다. 종교적 의식은 잘 지키지만, 은혜가 없으므로 죄의 지배 가운데 하나님을 대적했다.
신자가 은혜를 잃어버리면 비신자만도 못하게 타락할 수 있다. 은혜의 고갈로 전쟁에 무력한 신자는 다른 것이 우선이 아니고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로부터 회개를 외치신 이유가 이것이다. 죄가 극심하여 은혜의 그릇이 깨진 상태에서는 회개가 필요하다. 이미 돌아선 자들은 그래도 하지 않겠지만 고칠 방법은 회개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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