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7:29 '산상수훈'이라고 불리는 이 가르침은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5가지 교훈 중에 가장 유명하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의에 관한 진술로, 구약 율법의 의와 연속선상에 있으면서(5:17~19) 그것을 뛰어넘는 궁극적인 형태의 의를 제시한다. 다시 말해 율법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행위를 감독하지만, 여기서는 내면의 동기나 생각까지 죄가 될 수 있음을 언급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택하신 자녀들이 율법의 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하늘 아버지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기 바라신다.
5:1 went up on the mountain. 예수님은 구태여 장소를 찾으실 필요가 없었다. 모든 일정과 계획을 아버지께 맡기며 순종하였기 때문이다. 산에 오르심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계명을 수여하시던 상황을 떠올려 준다. 물론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분명한 사실은 택하신 자들을 사랑하시고 복과 은혜 베푸시길 기뻐하신다는 점이다. sat down. 당시 유대의 랍비는 앉아서 가르치는 것이 일종의 관행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his disciples. 앞으로 전해주실 교훈은 일반 서기관들에게는 없는 신적 권위가 담긴 가르침이며(7:29) 상당히 높은 수준의 의를 요구한다(5:20).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지금 주 앞에 모인 자들은 하늘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입어 영적으로 큰 성장을 이룰 기회를 받은 것이다.
5:3 Blessed. 단순히 '행복'이라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표현이다. 이것은 하늘나라에 합당한 영적 상태에 이른 것과 언약에 포함된 현세·내세의 모든 충만한 복이 임하게 될 것을 보증한다. poor in spirit. 인간의 내적 상태는 기아나 다름없는 매우 처참한 상황에 놓여있다. 이는 육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죄에 가로막혀 은혜의 공급이 차단된 속사람의 실상을 가리켜 이르는 말이다. 죄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을 형성해 육의 상태와 별개로 내면을 궁핍하게 만든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은혜에 대한 사모함이 생겨나면, 그때 비로소 복을 누릴 자격이 주어진다.
5:4 those who mourn. 하나님의 영은 죄로 얼룩진 심령에 서치라이트 같은 밝은 빛을 비추신다. 그 빛은 그동안 감춰둔 죄와 온갖 더러운 것을 남김없이 비추며 자신의 진면목을 확인시켜준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충격과 두려움에 휩싸여 애통할 수밖에 없다.
5:5 the meek. 여기서 '온유'는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고 자기 의가 깨어진 결과로 오는 유순함이다. 인위적 노력에 의해서 얻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주어진다. 심령의 변화는 오직 하나님만이 일으키실 수 있다. inherit the earth. 유대 자손들에게 이것은 전혀 생소한 것이 아니다. 이들은 약속의 성취로 땅을 유산으로 얻었고 이때까지 그곳에 거주하였다. 땅은 언약과 관련해서 자주 거론되며 주로 '하나님의 축복'으로 해석된다.
5:6 hunger . . . for righteousness. 스스로 의롭다고 착각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곁에 계심을 의식하고 매순간을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자를 말한다(눅 18:9~14).
5:7 they shall receive mercy. 복이 차츰씩 쌓이다 보면 본래 가졌던 면과 다른 성품이 나타난다.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말과 행실에서 향내가 풍긴다. 이런 단계까지 이르면 더 이상 궁핍한 상태가 아니다. 속사람이 배불리 먹어 기뻐하기에 자연히 남을 긍휼히 여긴다.
5:8 they shall see God. 출 33:20에 나를 보고 살 자가 없다고 하신 말씀과 상충하여 미처 이루어지기 어려워 보인다. 따라서 해석가들은 주로 종말론적 의미에 중점을 두고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받게 될 보상으로 여긴다. 그런데 너무 학자들의 말만 믿어서도 안 된다. 그들도 사람이며 충분히 틀릴 수 있으니 말이다. 이 땅에서 주를 보지 못한다는 단정은 우리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현세, 내세 구분하지 않고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쪽으로 해석의 문을 열어놓을 때 마음이 편하다. 다만 마음이 청결한 자라 하였으므로 마음속의 더러운 죄악을 보혈로 씻어야 한다. 모세나 요한 수준의 정결함에 이르면 그분의 참모습을 말씀 그대로 보게 될지도 모른다(요일 3:2; 계 22:4).
5:9 peacemakers. 불화의 원인은 다른 데 있지 않고 항상 자신 안에 존재한다. 그것은 다툼을 일으키는 일에 특화되어 어디를 가든 사사건건 문제가 터지게 만든다. 그러므로 빨리 회개해서 그 더러운 죄성을 최대한 몸 밖으로 몰아내야 한다. 십자가의 고귀한 희생으로 인류를 죄의 속박에서 구원해 내신 주님은 진정으로 평강의 왕이시다(사 9:6).
5:13 salt. 주로 음식의 맛을 내거나 부패를 막는 용도로 사용한다. 이 은유를 통해 제자들은 택한 자녀로서 정체성과 세상 속에서 이루어야 할 사명에 관해 인식하였다.
5:14 light. 사 60:1~3에 따르면,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영광에 덧입혀 그 빛남으로 나라들을 인도하게 되리라 예언했다. 예수님은 영적 이스라엘이시며, 자신에 대해 '세상의 빛'이라 선언하셨다(요 8:12). 이제 주님의 빛은 교회를 통해 세상을 향해 비친다(요일 1:8~10).
5:17 Law or the Prophets.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쓰인다. not come to abolish . . . but to fulfill. 예수님은 유대인이면서 유대인의 관행과 금기 등을 따르지 않는 모습을 보이셨다. 주님의 이 같은 행보는 어떤 무리의 눈에 율법을 파훼하려는 뜻으로 비쳤을 것이다. 당시 유대 랍비들은 율법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이해하여 본질과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해석을 진전시켰고, 결국에는 율법주의라는 늪에 빠져 버렸다. 그리고 참된 가르침을 전하러 오신 주님을 대적하는 일에 앞장섰다.
5:18 iota . . . dot. '이오타'는 헬라어 원문에서 가져왔으며, '닷'은 헬라어 '케라이아'의 영문 번역이다. 두 단어는 각각 가장 작은 히브리어 문자 '요드'와 표기에 들어가는 작은 기호를 염두에 둔 표현일 것이다. until all is accomplished.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때가 오면 더 이상 율법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정죄함이 없으며 죄가 완전히 사라진 세상이 열릴 것이다(계 22:3).
5:20 unless your righteousness exceeds.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율법의 의로 자기가 완전히 의롭다고 여기던 자들이다. 하지만 주님께서 보시기에 그들은 천국에 들어갈 만한 의를 소유하지 못했다. 그 누구도 율법의 요구 앞에서 완전하지 않으며, 이미 죄로 인해 점령된 상태다(요 8:44). 따라서 회개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율법의 올바른 의미를 배우는 것은 어쩌면 둘째 문제다.
5:21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가르친 내용에 대한 언급이다.
5:22 You fool. 우리말로 '바보'라는 표현처럼 별로 심하지 않은 욕이다. 하지만 이 욕설의 대가는 지옥에 던져질 만큼 크다고 하신다. hell of fire. 이러한 묘사는 유일하게 마태복음에서만 등장한다. '지옥'을 의미하는 헬라어 '게엔나'는 아람어 '게 힌남'에서 나온 말이다(수 15:8, 18:16). 힌놈 골짜기는 예루살렘 한편을 감싸고 있는 계곡으로, 한때 우상숭배자들이 몰렉에게 인신 제사를 바치던 곳으로 악명 높다(왕하 23:10). 그 이후에 예루살렘의 쓰레기 소각시설로 변모하였다. 이곳의 불은 영원한 불길 속에서 받을 형벌에 관한 은유로서 적절하다.
5:25 Come to terms quickly. 이 경우는 법적 분쟁에 휘말릴 상황을 염두에 두신 것 같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가능한 한 이웃과 화목하려고 애써야 한다(롬 12:14~21).
5:29 tear it out. 자칫 오해가 빚어질 수 있는 내용이라 주의가 필요하다. 여기서 주님께서 강조하시는 바는 하나님 나라를 취하려는 자에게 요구되는 마음의 자세라고 여겨진다. 곧 자신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그것을 끊으리라는 희생적 결단을 촉구하시는 발언이다. 몸의 각 지체는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매우 소중한 것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비할 바는 아니다.
5:32 이혼에 대한 신학적 해설 참조.
5:34 Do not take an oath. 맹세를 전면으로 금한다는 의미인지 확실하지 않다. 간혹 어떤 일에 대해 결단의 표시로 맹세를 활용하는 사례가 있지만, 성경은 이를 지적하는 일이 없다(롬 1:9). 아마도 주님께서는 교묘한 말장난으로 책임을 회피하려는 자들의 부도덕함을 질타하시는 것으로 보인다.
5:38 An eye for an eye. 이 같은 표현이 출 21:24; 레 24:20; 신 19:21의 70인역에도 등장한다. 이 율법은 눈을 예시로 삼아 가해자에 대한 지나친 처벌을 방지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받은 만큼 돌려주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전부 용서해 주어야 할 것이다. 율법의 본질은 사랑이다. 사랑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율법이 필요치 않다.
5:39 Do not resist. 문맥상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롬 12:17). 보복은 자기 위안에 도움이 되겠지만, 영적으로 받을 해를 고려하면 오히려 손해를 입는 일이다. 심판의 주체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니 내 뜻을 주장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시 96:13).
5:41 if anyone forces you. 비록 피지배자 입장에서 받는 명령이라도 가능하다면 들어주는 편이 자신에게 이롭다. 이 세상 권세는 하늘의 아버지께로 말미암은 것이므로 무시하거나 대적하는 행위는 옳지 않다(요 19:11).
5:43 hate your enemy. 구약성경에 이러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율법에 근거하지 않거나 혹은 정치적 편견에서 기인한 주장이나 풍문이었을지 모른다.
5:45 sons of your Father. 아들이 아버지를 닮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곧 하나님의 자녀로 합당히 여김을 받으려면, 세상에 공평과 선을 나타내시는 하늘 아버지의 자애로움을 본받아야 한다.
5:48 be perfect. 이 장의 결론처럼 매우 중요한 진술이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는 다름 아닌 하늘 아버지의 완전하심 같이 우리도 완전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성도들은 완전함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발걸음을 쉬지 말고 나아가야 한다(빌 3:1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