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2 양의 우리는 양 떼를 가두기도 하지만 맹수나 다른 침입자로부터 지키는 역할을 한다. 이것을 불법적으로 통과하는 자는 당연히 도적이며, 문으로 드나드는 이는 목자다.
10:3 The sheep hear.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들음은 우리도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함을 시사한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시고 그의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역사하신다. 반대로 그의 자녀가 아닌 자들은 말씀에 반응하지 않는다(8:47). he calls. 실제로 양에게 이름을 붙여 부른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데 여기서는 비유로 하신 말씀이다. 목자로서 우리를 돌보시는 주님은 우리의 이름을 알며 부르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
10:4 know his voice. 하나님의 자녀들은 믿음과 더불어 그분의 음성을 듣도록 영적인 분별력을 가진다. 다만 영적으로 혼탁한 상태에 있으면 욕심에 끌리거나 미혹을 받는 등 죄인의 길에 설 수 있다.
10:8 All who came before me. 겔 34장에 언급된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염두에 두신 표현으로 여겨지며 현재의 종교 지도자들도 포함일 것이다.
10:10 도둑과 예수님의 차이를 죽음과 생명이라는 상반된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둘은 공존할 수 없으므로 예수님은 수시로 위협을 당하셨다.
10:11, 12 여기에 사용된 비유는 둘 다 목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한편은 선하고 다른 편은 악하다. 악한 목자를 삯꾼이라 이름한 까닭은 그가 책임은 감당하지 않고 자기 몫만 챙기려 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선하게 자신의 책무를 이행했다면 세상 역사가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르게 전개되었을지 모른다.
10:15 I lay down my life for the sheep. 선한 목자가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처럼, 예수님은 죄로 인해 멸망할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셨다. 이 사실을 오늘날의 사람들은 믿기 어려워 하지만 당시 사람들도 그러했다.
10:17, 18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신 것은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생명을 취할 자는 아무도 없고, 오직 스스로 버리거나 다시 찾으실 뿐이라는 설명이다.
10:22 Feast of Dedication. '하누카' 혹은 '성전 봉헌절'이라 부르기도 하며, 안티오쿠스 4세가 저지른 만행에 대해 봉기를 일으키고 성전을 되찾은 일을 기념하는 절기다.
10:23 colonnade of Solomon. 성전 동편에 마련된 긴 복도를 말한다. 지붕이 덮여있어 햇빛을 피할 수 있다.
10:26 믿음은 사람이 원해서 얻거나 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엡 2:8). 따라서 주께 나아오는 자들은 아버지께서 택하셔서 믿음을 부어주신 것이며, 그렇지 않은 자들은 안타깝게도 택함을 못 받은 것이다. 예정에 관한 신학적 해설 참조.
10:28~30 24절에 유대인들이 질문한 것에 대한 답으로, 주가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드러낸다. 이는 분명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며, 들은 자들은 그분을 믿지 않은 일에 대해 하늘에서 핑계하지 못할 것이다.
10:31 위에서 밝히 말하라 하였던 것이 진실을 알고자 한 뜻에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죽일 구실을 얻고자 한 계략인 것이 밝혀졌다. 만약 짐작하고 있었고 확증이 필요한 것이었다면 이렇게 나올 게 아니라 엎드려 경배함이 자연스럽다. 이들의 행동에서 유대인들의 깊은 불신을 엿볼 수 있다.
10:39 예수님을 사람으로 단정하여 신성모독을 운운하던 자들은 그를 잡고 싶어도 잡지 못했다. 무리가 겨우 사람 한 명을 잡지 못한 것이 바른 깨달음을 위한 단서가 되었길 바란다(17,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