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년 간, 이스라엘은 외세의 압력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누렸다. 삼손은 블레셋 성읍을 자유롭게 드나들었으며 어떤 제지도 받지 않았다. 다만 그곳은 향락적인 문화가 발달한 음란한 성읍이었다. 어느덧 중년이 된 삼손은 소렉 골짜기에 사는 들릴라라는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 여자는 블레셋 여인이었다. 그는 워낙 주목을 끄는 인물이었던 탓에 그의 관련된 소문은 소리 소문 없이 퍼졌다. 그 소식은 삼손을 포획할 기회만 노리고 있던 블레셋 영주들의 귀를 번쩍 뜨이게 하였다. 그들은 삼손을 잡아들일 은밀한 계획을 모의하고 난 후, 들릴라에게 접근하였다.
“당신이 들릴라요?”
“예, 맞아요. 어르신들, 저희 가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접대에 능숙한 들릴라가 웃으며 공손히 인사하였다.
“아니, 우리는 손님으로 온 것이 아니야. 한 가지 거래를 했으면 하는데···.”
곁에 섰던 다른 이가 말을 이어받았다.
“네가 삼손과 가까운 사이라지? 거두절미하고 그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또 어떻게 그를 제압할 수 있는지 알아내거라.”
말과 행색에서 그들은 지도층 인사임을 강하게 어필했다.
“예, 나리. 무슨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오나 이것이 탄로 나면 저와 제 가족은 물론, 저희 성읍이 완전히 망할지도 모릅니다요.”
영주들은 저마다 품에서 은화가 두둑이 들어있는 주머니를 꺼내어 보였다.
“우리는 거저 심부름시키려는 게 아니다. 네가 그 비밀을 캐어 우리에게 알려주면, 이 돈이 다 네 것이 될 것이다. 이 가게를 접어도 평생 먹고살만하겠지.”
“예, 나리. 분부하신 대로 성심 성의껏 따르겠습니다.”
들릴라는 그들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날 저녁에도 삼손은 여느 때나 다름없이 그녀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녀는 삼손을 위해 특별히 정성 들인 요리를 마련하였고 곁에서 술 시중을 들었다. 기분이 좋아진 삼손은 그녀가 따라주는 술을 사양하지 않고 받아 마셨다. 들릴라는 그가 어느 정도 취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영웅담을 칭송하여 그의 자부심을 한껏 높여 주면서, 은연중에 그에게 질문하였다.
“삼손, 당신의 강한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당신을 꼼짝 못 하게 할 방법은 혹시 있나요?”
“나를 꼼짝 못 하게 할 방법 말이오? 하하하하.”
삼손은 그저 웃었으나, 속으로 미묘한 감정을 품었다.
“딱 한 가지 있소. 마르지 않은 칡 줄기로 일곱 겹 묶이면 아무리 나라도 꼼짝 못 할 거요.”
들릴라는 그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블레셋 영주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들은 곧 마르지 않은 칡 줄기 일곱 가닥을 가져다주고 그녀의 집으로 병사들을 배치하였다. 술에 취해 깊이 곯아떨어진 삼손은 그녀가 흔들어보아도 깨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칡 줄기로 삼손의 손목과 발목을 단단히 묶고 소리를 질렀다.
“삼손! 블레셋 사람들이 당신을 잡으러 왔어요!”
퍼뜩 깨어난 삼손은 마치 실을 끊듯이 묶은 줄을 끊어 버렸다.
“뭣이!? 그놈들은 어디 있어?”
삼손은 주위를 둘러보며 싸울 태세를 하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들릴라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따져 물었다.
“이봐요, 삼손. 나를 놀렸군요. 당신이 가르쳐준 말은 순 거짓이네요. 설마 나한테 사랑한다고 했던 말도 거짓인가요?”
“설마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당신은 모를 거요.”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있죠? 나에게 비밀을 숨기면서 어떻게 날 사랑한다는 거예요!”
“알았소, 이번엔 진짜요.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새 밧줄로 나를 꽁꽁 묶으면, 나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게 될 거요.”
다급해진 삼손은 보채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일단 둘러대었다. 다음 날, 들릴라는 삼손이 잠든 시간을 노려 새 밧줄로 그의 몸을 꽁꽁 묶고 소리쳤다.
“삼손! 블레셋 사람들이 당신을 잡으러 왔어요!”
그러자, 삼손이 번뜩 눈을 뜨고 밧줄을 실오라기 끊듯이 끊어 버렸다. 들릴라는 집 안팎을 살피며 적을 경계하는 삼손에게 화가 잔뜩 난 것처럼 쏘아보았다.
“또 거짓말이었군요. 이렇게 나를 놀려먹는 게 재밌나 봐요?”
또다시 난처한 입장이 된 삼손은 사실대로 말을 해줄지 아니면 비밀을 고수해야 할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너무 화내지 말아요. 사실을 말해 줄 테니, 내 머리 일곱 가닥을 베틀 날실에 섞어 짠 다음 그것으로 쐐기로 단단히 고정시키면 나는 힘을 못쓰게 될 거라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적당히 넘어가기를 바랐다. 다음 날 들릴라는 그가 곤히 잠든 사이에 그의 머리칼 일곱 가닥을 취하여 베틀 날실에 섞어 짜고 그것을 베틀 말뚝에 꽉 잡아매었다. 그러고 나서 소리쳤다.
“삼손! 삼손! 블레셋 사람들이 당신을 잡으러 왔어요!”
이내 잠에서 깨어난 삼손은 몸에 거슬리는 끈과 천들을 전부 뜯어냈다. 그러고 나서 들릴라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울면서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나를 믿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내가 블레셋 여자라서 당신을 속일까 봐 의심하는 건가요? 당신은 매 번 나를 속이고 이제까지 세 번이나 거짓말을 했어요. 나를 가지고 논 게 이번이 세 번째라고요!”
들릴라는 울면서 방을 뛰쳐나갔다. 그날 이 후로 그녀는 화를 풀지 않고 그에게 냉담한 반응만 보였다. 삼손은 자신이 너무했나 하는 자책감에 괴로워했다. 그녀를 매우 신뢰한 나머지, 자신을 둘러싼 음모가 있다는 사실은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며칠이 지나도 둘 사이의 갈등 문제는 해소되지 않았고, 삼손은 견디다 못하여 진실을 밝히기로 결심하였다.
“······당신에게 진실을 가르쳐 주겠소.”
들릴라는 드디어 촉이 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머리에 한 번도 면도칼을 댄 적이 없소. 나는 잉태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었소. 내 머리털을 밀면 나는 힘이 빠지고 무력해져서 여느 인간과 다를 바 없게 될 것이요.”
삼손의 말은 가감 없는 사실이었다. 들릴라는 삼손이 진실을 털어놓았음을 직감하고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블레셋 영주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날 들릴라는 화해를 가장하여 그에게 술을 마시게 하셨고 그녀의 무릎을 베고 잠들게 하였다. 블레셋 인을 불러 일곱 가닥으로 땋은 그의 머리털을 자르게 했다. 곧 블레셋 영주들이 무장한 병사들을 대동하고 그녀의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삼손, 블레셋 사람들이 당신을 잡으러 왔어요!”
삼손이 깨어났을 때는 벌써 블레셋 인들에게 포위를 당하고 창으로 겨누어진 상태였다. 그는 단숨에 그들을 때려눕히려고 일어섰으나 그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이 떠나간 후라, 그의 힘은 보통 사람의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병사들에게 쉽게 제압당하고서 밧줄로 결박되었다. 블레셋 영주들은 병사들에게 삼손의 두 눈이 뽑으라고 지시했다. 삼손은 사랑하는 여자의 배신과 블레셋 인들로부터 당하는 수모에 오열을 터뜨렸다. 그는 가사로 끌려 내려가 짐승처럼 연자 맷돌을 돌리는 일에 부려졌다. 인생의 가장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이미지 by Sweet Publishing
'언약 내러티브' 카테고리의 다른 글
53장 예언자 (0) | 2021.06.23 |
---|---|
52장 소망의 빛줄기 (0) | 2021.06.23 |
50장 피의 보복전 (0) | 2021.06.23 |
49장 수수께끼 (0) | 2021.06.23 |
48장 나실인 (0) | 2021.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