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해 본 적 있으신가요? 흔히 금수저, 외모나 학벌이 뛰어난 사람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좋은 집안에 태어나 행복하고, 하는 일마다 잘 돼서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정반대의 삶을 사는 이가 있습니다. 불치·난치성 질병에 걸리거나 불의한 사고로 장애를 갖게 된 사람, 부모의 이혼이나 사업 실패, 누군가로부터 폭력, 성추행, 위협을 당하여 정신적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은 참 연약합니다. 인생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거나 원치 않는 일이 생겼을 때 물리칠 힘이 없습니다. 성공자라고 해서 초월적인 능력을 갖고 있지 않고, 실패자라고 해서 대단히 무능력하지 않습니다. 대개 사람은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은 복을 받고 누군가는 불행한데 그 이유는 무엇이며,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이 문제는 저뿐만 아니라 특히 고통받는 이들의 공통된 고민입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믿었던 저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내 삶이 불행한 이유를 하나님에게서 찾았습니다. 많은 세월을 불평하면서 보냈습니다. 나 자신은 축복에서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복을 받기 위해 부르짖는 기도, 간구 기도가 많았습니다. 축복의 개념이 바로 잡히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됐습니다. 심각한 오류 중의 하나가 이것이었죠.
축복=부, 번창, 유명세
고난=고통, 저주, 벗어야 할 짐
축복과 고난의 개념이 어긋나면 하나님에 대한 시각 또한 어긋나게 됩니다. 내게 좋은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고, 내게 고통이 따르면 하나님은 안 좋은 분이 되는 겁니다. 내 형편에 따라 금방 좋은 분이 되셨다가 나쁜 분도 되시는 겁니다. 이것이 올바를 리는 없겠지요. 여러분은 축복과 고난에 대해 얼마나 아시는지요?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고난 가운데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다면 바른 깨달음에 도달했다고 여겨집니다.
오늘 이야기하려는 내용은 보응입니다. 앞서 한 이야기와 다른 것 같은데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보응이 주로 고난이란 형태로 찾아오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보응이 철저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잘 아실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계명을 주시면서,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말씀하셨습니다(출 20:5).
또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하셨습니다(출 34:6~7). 하나님께서 모세의 중재로 이스라엘을 용서하셨지만 벌을 면제하지는 않는다고 하십니다. 실제로, 출애굽기와 민수기를 읽으면 이스라엘의 죄와 하나님의 징벌이 반복 교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은 보응이며 징벌의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죄와 보응이 나타난 곳을 찾으라면 대여섯 가지는 쉽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전 글에서 언급한 예가 있으며 이 밖에도 많습니다.
▲ 사울 왕은 기브온 주민의 땅을 탐하여 그들을 몰살시키고 빼앗으려던 적이 있었는데, 그 일로 다윗이 치리하는 시기에 3년 동안 기근이 왔습니다. 다윗은 사울 가문의 일곱 사람을 데려다 기브온 주민에게 넘기고, 그들은 목매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비가 내렸습니다. 사울의 죄질이 악하여 강한 보응이 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삼하 21:1~14).
▲ 다윗이 부하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 사건으로 인해 자식이 형제의 칼에 죽으며,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아내들을 빼앗기는 보응이 임했습니다(삼하 11~12장).
▲ 므낫세 왕이 우상숭배와 살인으로 가득히 채운 죄는 유다 왕국이 멸망하고 그의 자식, 손자들이 외세에 탄압받고 끌려가고 죽음으로써 그 대가를 치렀습니다. 살인은 중범죄에 속하여 대가 끊기게 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렇다면 고난은 받아야 할 대가를 받는 거니까 감사할 이유가 될 수 있나 싶네요. 죗값으로 고난만 받는다면 말입니다. 다행히도 감사할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무엇이냐면 죄로 인해 받는 보응은 죄를 사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죄가 사해진다는 의미는 굉장한 것입니다. 사람은 죽으면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습니다. 죄가 많은 사람이 큰 형벌에 처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만약 이 땅에서 보응을 받은 사람이라면 죄가 사해져서 형벌을 적게 받을 것입니다. 받는 보응과 비례해서 구원받을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 괜히 보응을 내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사하시려고, 축복해 주시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축복을 주시는 분이지, 사람에게 저주를 내리시는 분이 아님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래도 역시 보응은 달게 받기가 어려울 듯싶습니다. 보응은 축복이라 말할 수 있지만, 극심한 고난에 처해있는 사람에게는 위로가 안 됩니다. 고난이 괴로운 건 당연하니 말입니다.
다만 아실 것은 죄가 없으신 분이 인간의 더럽고 추한 죄를 지고 저주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입니다. 보응은 선조와 부모, 자신의 죄로 당하는 것인데 예수님은 죄와 상관 없으신 분입니다. 보잘것없지만 우리도 예수님처럼 보응을 감당합니다.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짊어주신 것이라면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나와 내 아들, 손자, 증손자 쭉 이어지는 계보를 하나로 여기십니다. 축복이든 고난이든 함께 받으며 감당하는 것입니다. 간혹 자손이 끊기게 하는 죄가 있습니다만 그러한 죄라도 나누어 감당하면 벌이 옅어집니다. 괴로운 시절은 어느 순간 지나갈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영원한 나라의 삶을 위한 준비 작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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