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the deeds of the Christ. 요한이 전해 들은 바는 예수께서 메시아로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일 것이다. 그런데 확신이 들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님의 대적과 악인에 대한 종말론적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사 13:9; 단 7:9~11; 습 1:15, 2:2, 3; 말 4:1). 그는 악인에게 붙잡혀 모욕당하며 처량한 신세가 되었는데, 주권자께서 이에 대해 잠잠히 계셨다. 그가 원망하지 않음은 당시 누구보다 의로웠던 그의 성정을 보여준다.
11:4~6 예수님은 믿음이 약해진 그들을 보며 실망하시기보다 오히려 믿을 수 있는 증거를 보이신다(사 35:5, 6). 당장은 악인이 득세하더라도 꾹 참고 인내해야 한다. 머지않아 그들에게 죗값으로 형벌이 주어질 것이다. 예수님의 일차적 목적은 죄인에게 내려질 하나님의 진노를 자신이 대신 담당하심으로 죄 많은 백성을 멸망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다.
11:9 more than a prophet. 이 시점에서 요한은 중대한 죄목을 뒤집어쓴 채 옥에 갇혀있는 신세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못다 핀 꽃처럼 가련한 인생으로 보인다. 그는 실패자요 버림받은 것 같다. 하지만 주님의 관점에서는 더없이 소중한 아들이며 선지자보다 나은 종이다.
11:11 greater than he. 이 땅의 가장 큰 영화라도 천국의 것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마치 돌이 순금에 비할 수 없듯이 말이다. 이미 천국에 들어간 백성은 희미하거나 가려지지 않은 그분의 참 얼굴을 뵈었으며, 깨끗하고 썩지 아니할 새 몸을 입어 순결한 빛을 발한다(고후 3:18). 그 모습은 가장 미천한 자라 하여도 위대한 선지자 요한보다 나을 수밖에 없다.
11:12 suffered violence. 구원에 이르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복음은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어 반응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약 2:22). 이 반응으로 우리는 매우 절박할뿐더라 처절하기까지 하다. 죄를 끊고 죄를 씻는 과정은 철옹성 같은 견고한 요새를 상대로 공성전을 벌이는 것과 같다(12:29).
11:14 he is Elijah. 세례 요한이 말 4:5에 예언된 '엘리야'임을 분명히 하신다. 어떤 사람은 그 엘리야를 실제 엘리야로 오해했던 것으로 보인다(요 1:21). 그는 그런 의미에서 '엘리야'가 아니고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갖춘 인물이다(눅 1:17).
11:16 children . . . calling to their playmates. 대체로 성경은 아이들에 대해 좋은 의미를 담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 아이들치고는 불평이 많고 까다로운 성향을 보인다. 이들은 주의 종(세례 요한, 예수님)에 대해 불신하고 조롱과 비난을 쏟아내는 '이 세대'를 가리킨다.
11:19 Son of Man. 8:20 해설 참조. wisdom is justified by her deeds. 진실은 꼭 밝혀진다는 말이 있듯이, 예로부터 관용적으로 쓰이던 표현으로 보인다. 악인의 비방하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의로운 행위는 결국 의롭다 인정받게 될 것이다.
11:20 the cities where most of his mighty works had been done. 지적된 성읍들은 적지 않은 혜택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거기서 행하신 권능은 확실한 표적이요 세상에 전례 없는 기적의 향연이었다. 이만하면 그에 상응하는 반응을 보여야 마땅한데, 본문에는 회개하지 않았다고 나와 있다. 이들은 과거에 지은 죄와 더불어, 회개하지 않는 죄에 대해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11:24).
11:25 you have hidden . . . and revealed. 하나님 나라의 역설이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이른바 지혜롭다고 자부하는 자들은 '이것'에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린아이로 표현된 자들에게는 믿음이 주어졌다. 이러한 역설은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함이다(고전 1:26~29).
11:27 handed over to me. 모든 권세가 주께 속했음을 드러내는 실로 경이로운 선언이다. 단 7:13, 14에 따르면, 다니엘은 인자 같은 이가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으시는 모습을 보았다.
11:28 Come to me. 잠 9:1~5의 의인화된 지혜를 상기시켜 주는 대목이다. 지친 자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이지만 예수님 없이는 온전한 휴식을 얻지 못한다. 주의 품 안에서 지치고 상처 가득한 마음이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사 61:1). 또한 괴로움을 주고 번민을 일으키는 더러운 영을 물리치고 참 자유를 얻게 하신다(요 8:32). heavy laden. 미쉬나, 곧 율법에 관한 세밀한 기준을 가리킨다. 이는 전통적 유대인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것으로(행 15:10), 이미 사회 곳곳에 뿌리를 내려 기반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율법은 본래 주어진 의도와 다르게 억압을 상징하는 멍에로 전락했다. 그리고 정작 가르치는 자들은 작은 규정에 얽매여 그보다 큰 계명을 거스르는 모순을 저질렀다(23:23; 막 7:13).
11:29, 30 Take my yoke . . . my yoke is easy. 여기서 '멍에'는 율법주의자의 무거운 짐과 본질적으로 다르다(12:2, 15:2, 23:2~4; 행 15:10). 율법의 의는 제아무리 노력해도 다다르지 못하는 미답의 영역이다. 반면 예수님께서 짊어주시는 짐은 연약한 우리도 충분히 견딜 수 있는 무게다. 또한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이의 능력으로 감당할 힘을 얻는다(롬 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