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재주와 능력을 재능이라고 하며, 우리식으로 은사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이것에 대해 알고 있다. 어렴풋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아무튼, 이것이 타고나는 것이요 하늘에서 내려준다는 사실을 대부분 안다.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은사를 주시는 분이 누구인지 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은혜로우신 성령님은 은사를 나눠주심에 있어 차별이 없으셨다. 착하거나 혹은 불쌍해서, 아니면 왕이 될 사람이라 더 많이 주시지 않고, 누구를 막론하고 풍성히 베푸셨다. 딱 이 사람만 제외하고 말이다. 첫 사람 아담에게 하나님은 모든 은사를 아낌없이 내리셨다. 그는 소위 '다 가진 사람'이었다. 살짝 과장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를 말함이다. 그는 진정으로 다 가진 사람으로서 과거·현재·미래를 통틀어 정점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다.
다시 정리하여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은사를 풍성히 주셨다. 열등감을 가진 이는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는 좋은 것을 주고 나에게는 필요 없는 것을 주셨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우리는 은연중에 무엇이 좋은 은사다 하고 기준을 정하는데 그런 마인드를 가지면 언제나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다. 각 사람이 가진 은사는 우열을 가릴 수 없다. 아직 발견하지 못했거나 활용하지 않아서 그렇지 가진 은사만 충분히 활용한다면 누구든 부족함 없이 살아갈 수 있다.
은사는 크게 일반 은사와 특별 은사로 나뉜다. 일반 은사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주시는 은혜며, 매우 다양하고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은사들이다. 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는 데 한계가 있다. 특별 은사는 성령의 은사라고도 하며 믿는 사람에게만 나타난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에 특화되었다. 세상적으로 잘되려면 일반 은사가, 천국에서 칭찬받으려면 특별 은사가 좋아야 함은 당연한 사실이다. 만약 두 가지 중 한쪽을 택하라 한다면 고민할 것 없이 후자를 택해야 할 것이다.
성령의 은사
성령의 은사는 교회를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선물이다. 바울은 고전 12:8~10에 성령의 9가지 은사를 언급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 지혜의 말씀의 은사: 성령께서 계시하시는 바를 환상으로 보거나 음성으로 듣는다.
- 지식의 말씀의 은사: 지혜의 말씀의 은사처럼 환상이나 음성으로 계시를 받는다.
- 믿음의 은사: 일반적인 믿음과 구별된, 신령하고 확실한 증거에 따른 믿음을 소유한다.
- 병 고침의 은사: 질병이나 사고로 쇠약해진 사람을 초자연적으로 치유하는 능력.
- 능력 행함의 은사: 일반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이 일어난다.
- 예언의 은사: 말씀이 임하여 특정 대상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
- 영들 분별함의 은사: 영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을 감지하거나 분별한다.
- 방언의 은사: 속사람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영에 기반을 둔 언어로 말한다.
- 방언통변의 은사: 방언의 메시지나 노래를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전환한다.
성령의 은사는 이것이 다가 아니다. 나머지 은사들은 위의 9가지를 중심으로 세세하게 나눠진다. 마치 빛이 여러 갈래로 분산하듯이 하나의 은사로부터 여러 은사가 파생한다. 예를 들어 가르침의 은사는 지혜의 말씀의 은사에서 나온다. 은사 중에 가장 뛰어난 은사를 꼽으라면 단연 지혜의 말씀의 은사다. 이 은사는 은사들의 왕이다.
어떤 곳에서 사도, 선지자, 전도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 등 주요직을 은사로 여기는데, 이것은 직분이지 은사가 아니다. 또 사랑의 은사, 기쁨의 은사, 절제의 은사 등을 운운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성령의 열매이지 은사가 아니다. 성령의 열매는 동일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지만 은사에 속하지 않는다. 다만 성령의 열매와 관련된 은사가 존재한다.
은사중지론
성령님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교회의 모든 이들에게 은사를 베푸시고, 은사는 우리에게 각기 다른 모양으로 나타난다. 특히 성령의 은사는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기적과 치유를 이뤄낸, 최상의 은사다. 그런데 교계에는 성령의 은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몇 가지 입장이 존재한다.
모두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은사중지론의 경우 교리적으로 안 맞기 때문에 주의할 겸 알아두어야 한다. 은사중지론은 사도시대 이후로 은사가 중지되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사도시대 이후의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주장과 관련해서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를테면 당장 눈앞에서 병이 낫고 귀신이 쫓겨나도 이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또 예언을 한다고 하면 그것을 아니라고 부정한다. 은사를 가진 입장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관점이다.
어쨌거나 은사 중지에 관한 내용은 성경에 없기 때문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주장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만약 그들이 성령의 조명을 받아 성경을 해석했더라면 그런 이론이 나왔을 리 없다. 바울이 교회를 향해 은사를 적극 권장하였다면 당연히 그리해야 한다. 은사가 중지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며, 주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점에서 질이 나쁘다. 교회가 은사로부터 얻을 유익을 막는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 전체에 막대한 손해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하나님은 교회가 은사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교회를 망하게 하시지는 않는다. 다만 복과 은혜를 주실 수 없기 때문에 점차 쇠퇴하게 된다. 설령 교회가 잘되더라도 좋은 신호로 여길 수 없다.
은사의 성장과 퇴보
은사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없는 영역이다. 무엇이 필요하다고 느끼거나 원하기 전에 주어지기 때문이다. 마치 날 때부터 성별, 외모, 지능, 건강, 배경이 정해져 있는 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것은 우리가 정할 수 없고 바꿀 수도 없어서 한번 정해지면 그것이 좋든, 싫든 그대로 살아야 한다. 대부분의 은사는 처음 받으면 큰 변동 없이 죽는 날까지 유지된다.
그런데 은사 중에는 소수지만 성장이 가능한 은사가 있다. 전에는 나타나지 않던 은사가 나타나기도 한다. 일반 은사 중 최고의 은사인 지혜의 은사와 지식의 은사 그리고 성령의 은사가 성장 가능한 은사들이다.
은사가 성장하려면 자주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은사를 부어주시도록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주신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지혜의 은사와 지식의 은사는 여러 가지 일을 경험하고 지식을 습득할 때 성장한다. 성령의 은사는 교회 사역이라든지 삶 속에서 꾸준히 활용해야 성장한다. 근육을 키우려면 일정 수준의 강도로 운동을 지속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반면 사용하지 않고 지내면 점점 약해지고 사라진다. 퇴보가 일어나는 것이다. 같은 은사를 받았어도 계속 사용하는 사람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이가 벌어진다.
은사를 인정하지 않거나 활용에 미온적인 교회에서 성령의 은사가 안 나타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사용하지 않아서 퇴보했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를 인정하지 않으면 있던 것마저 줄어들다가 나중에 소멸한다. 그래서 사용하고 싶어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성령의 은사가 오늘날에 실존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더욱 굳어지는 악순환에 빠진다.
은사 오용
은사주의 교회나 단체가 반대 입장에 선 교회로부터 비판을 받는 이유는 은사 오용 때문이다. 교리적인 부분은 교단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은사 오용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는 기독교 전체에 악영향을 주는 만큼 좌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은사를 인정하는 입장이 교계에서 은사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부터 반대 세력의 비판적 관점이 어느 정도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반대 입장에서 지적하는 은사 오용의 구체적인 사례는 '사역 시간'이라고 불리는 예배 이후의 행사에 관한 것인데 너무 감정에 치우친다든지, 마귀에게 놀아나는 기이한 일을 벌인다고 지적한다. 은사를 인정하지 않는 입장에서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부분이다. 앞서도 이야기하였지만 은사 오용으로 인한 문제는 기독교 전체의 피해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아주 무시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교리적인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몇 가지 지적에 대해서는 수용하고 내부 문제를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은사 오용의 첫 번째 문제는 검증되지 않은 사역자를 세우는 것이다. 은사 사역자로서 검증되지 않은 사람을 사역자로 세우는 것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를 발람으로 교체하는 것만큼 위험하다. 발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었고, 나귀의 입을 통한 계시도 들었다. 결정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대로 이스라엘을 축복했다. 이처럼 신령한 능력의 소유자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면 어떻게 될까? 이것은 완전히 망하는 길이다.
예로부터 거짓 선지자들은 참 선지자보다 족히 열 배는 더 많았다. 그들이 선지자를 가장하였던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선지자라는 착각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가서 네게 말씀하시더냐"
거짓 선지자는 자신을 거짓 선지자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자신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알고 또한 믿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사역자가 속은 상태에서, 예언을 듣는 성도마저 속으면 그 교회는 거짓이라는 어둠에 잠겨 버린다. 거짓 선지자의 얼굴에는 거짓이라는 글자가 쓰여있지 않다. 그러나 영분별의 은사를 가진 이는 구별할 수 있다. 은사 사역자는 검증된 사람이어야 하고, 그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늘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주의 뜻이 무엇인지 구하고 사역에 임해야 한다.
두 번째 문제는 혼자서 너무 많은 사람을 상대로 사역하는 데서 발생한다. 다시 말해 은혜에 목마른 다수에게 유익을 주고자 하지만, 개인 차원에서 별 유익을 주지 못한다. 성령님이 임재하시면 그 장소에 모인 사람들에게서 다양한 영적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것을 목격한 것으로 끝난다면 별 유익이 없다. 종교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정말 계신다는 확신이 들겠지만, 많은 사람을 상대로 하는 만큼 영적으로 깊이 있게 들어가지 못한다.
은사 사역은 신비한 경험을 선사하는 쇼가 아니라 죄에 매인 영혼을 자유케 하는 것이다. 경건한 사람은 성령님이 임하실 때 몸이 저절로 움직이지 않는다. 몸이 자기 의지를 벗어나 움직이고, 이상한 소리를 지르거나 웃는 것은 악한 영이 작용하여 일어나는 현상이다. 더러운 영이 움직이는 것이므로 몸이 정결하지 않은 상태라는 말이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개인적인 사역이라면 영 진단과 더불어 회개하는 시간을 갖겠지만 너무 사람이 많아서 그러지 못한다. 따라서 감당하지도 못하면서 대중을 상대로 사역하는 것은 충분히 비판받을 요소다.
목회를 위해 활용하기
은사를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종으로 쓰시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은사를 받았으니 이제 내 것이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은사 오용의 문제가 일어나는 이유가 바로 은사를 개인의 소유로 여기는 데 있다. 이것은 교회적으로도 손해지만 사역자 본인에게 치명적이다. 자기가 주인이 되어 은사를 임의로 사용할 때 마주할 결말은 영적으로 수없이 공격받고 몸이 망가지는 것이며, 천국에 들어가는 것조차 불분명하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바르게 은사를 활용하는 방법은 많은 지식이나 배움이 필요하지 않다. 그대로 따르기 어려워서 그렇지 매우 간단하다. 은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은사를 내 의지로 사용하면서 하나님이 역사하시길 기대한다면 그것은 내가 주인이지 하나님이 주인이신 삶이 아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사역자는 매 순간 주님과 소통하고 주님이 주시는 말씀대로 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사역이요 바른 은사 사용이다. 대중을 모아 놓고 놀라운 성령 체험을 하게 해줄 것이 아니라 예배로 충분하고, 삶 속에서 짓는 죄를 매일 회개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려면 몸이 깨끗해야 한다. 회개하고 죄를 멀리하면 "성령님, 내 안에 오시옵소서" 구하지 않아도 들어오신다.
예배
예배에 있어 형태는 본질적인 부분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예배의 형태는 계속 변화되어 내려왔다. 가장 두드러진 전환을 맞이한 것은 약속하신 바 성령이 교회에 임하시고부터다. 이전에 드리던 예배에는 성령님이 오셔서 주관하지 않으셨다. 어디서든 제단을 쌓았고, 성전 안의 희생 제사, 회당에서 율법 낭독과 강해 설교가 있었으나 그것은 전부 인간이 주관하는 것이요 영적 예배가 아니었다. 따라서 구약의 예배는 본질을 담지 못한, 모형으로서의 예배였다.
지금이 은혜의 시기인 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교회에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하는 길이 열린 덕분이다. 은사를 받는 주의 종은 형식적인 예전에 묶여 과거의 것을 답습할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찬양, 기도, 즉석에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전해야 한다. 성령님은 부를 찬송, 기도 내용, 설교 말씀, 축복 기도를 모두 주관하시며 각양 은혜를 내려 주신다.
치유사역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는 복음의 본질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아무도 이것을 구원과 별개의 것으로 나눌 수 없다. 다만 은사가 없거나 은사가 있지만 잘 활용할 줄 몰라서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치유사역이라고 하면 흔히 은사주의 집회의 대규모 사역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형태의 사역이 참여자 개인에게 그리 좋지 않다는 말을 아까 하였다. 그리고 죄를 자백하는 회개가 없이는 온전한 자유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신앙 성숙으로 나아갈 수 없다.
목회자는 자기 이름의 명예를 위해 사역의 규모를 키우려는 생각을 우선 내려놔야 한다. 그리고 주께서 자기 목숨을 내어줄 만큼 사랑하신 영혼을 한 사람 한 사람 돌보는 목회를 해야 한다. 얕은 수준에 머물러 눈에 띄는 문제만 해결하지 말고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서 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온전히 회복시키는 데 집중해야 한다. 치유사역의 기초 참고.
성령님과 동행
은사를 어떻게 활용해야 잘할까? 목회자로서 자질이 부족한데 과연 내가 사역을 감당해도 되는 걸까? 이런 고민을 할 수 있는데 고민한다고 해서 나약한 사람은 아니니 충분히 고민하기를 권장한다. 오히려 고민하지 않는 사람이 나중에 실수할 일이 많을 것이다. 간단히 생각하자. 은사가 나타나지 않는 사람은 우선 은사를 받아야 한다. 은사가 나타나면 이제야 출발선에 선 것과 같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의 출발선 말이다. 앞선 고민은 성령님과 동행하기 전 나올 수 있는 고민이다. 결국 고민은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은사가 나타나는 사람은 크게 두 가지의 길을 간다. 하나는 자기 의지대로 사용하여 스스로를 높이는 길, 또 하나는 성령님과 동행하는 길이다. 성령님은 우리가 순종할 자세를 갖고 필요한 말씀을 기다릴 때 성심껏 답변해 주신다. 물어보는 일이 적어서 문제지 우리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도 우리보다 훨씬 정확하고 확실하고 유익하게 방법을 찾아주신다.
음식과 화장품에 대해서 예를 들면 각 사람에게 맞는 음식과 화장품이 있고 반대로 해가 되는 것이 있으며, 특정 생산자로부터 판매되는 물건이 좋고 나쁨에 대해 우리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신다. 그뿐만 아니라 거주할 곳이나 직장, 진로, 배우자를 정하는 일에 관여하시며, 세계정세가 어떻게 될지 등 일반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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