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가이드

율법주의의 폐해

이원범 2020. 2. 20. 10:00

오늘은 다소 무겁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율법주의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교회에 다닌다면 아마 들어본 적 있으실 겁니다. 율법주의는 우리에게 해악을 끼치는 면이 꽤 있기 때문에, 재미는 없더라도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알고 나서야 주의가 가능하니까요.

교회사에서 율법주의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때가 없었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율법주의도 항상 따라붙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변질시키며 교회를 병들게 만들었지요. 정말 주의해야 할 대상입니다. 율법주의는 복음의 반대 위치에 놓인, 서로 상충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복음과 율법주의는 무슨 차이가 있는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유대인은 일찍이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수여받았습니다. 율법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준수해야 할 다양한 법령입니다.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도덕법, 시민법, 의식법 등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을 반영하기에 의의 표준이며 높은 수준의 의를 요구합니다. 과연 지킬 수 있을까요? 절대 못 지킵니다. 조금 흉내 내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전부 지키기란 불가능하니까요(롬 3:23). 이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방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대속과 의의 전가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의를 의지하여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선포합니다. 나에게 의가 없으므로 예수님께 의를 전가받습니다.

율법주의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율법대로 살면 의를 획득할 수 있다고 믿으니까요. 대표적으로 바리새인들이 율법주의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조항을 확대하거나 구체적인 사례를 적용해 만든 규정인 '장로의 유전'을 지켰고, 그것을 율법과 동일한 선상에 두었습니다. 정결 예식에 따라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하지 않았으며, 바깥에 나갔다 들어오면 더욱 문질러서 씻었습니다. 그들은 이 같은 외적 행위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겼고, 자신들처럼 살지 않는 사람을 더러운 죄인이라 정죄했습니다. 애석하게도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기 의가 지나치게 강해 자신들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율법의 의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갈 2:16).

다음으로 넘어가서, 율법주의가 교회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바리새인 같은 율법주의자는 없는 줄 압니다. 율법주의 말고 행위로 얻는 구원관도 잘못된 것이므로 피해야 합니다. 주로 이단이 행위 구원을 강조하고 있지요.

정말 이야기하려는 것은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입니다. 개신교라면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가 선포되고 있을 텐데, 무엇이 문제일까요? 그 속에 율법주의적 요소가 섞여 문제가 발생합니다. 귀금속을 예로 든다면, 불순물이 많이 섞여있는 상태를 순수하다고 부르진 않잖아요. 그런 것처럼 다른 것이 섞인 복음을 순전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적하려는 불순물은 복음과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르침 속에 섞여 있어요. 성경에 근거한 것이 있지만 안 그런 것도 있고, 하나님이 원하실 것이 있지만 사람이 원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 불순물은 대체 무엇이며 어디서 온 걸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어르신들은 유교 문화에 영향을 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러한 환경에서 자라났기 때문입니다. 유교에서 권장하는 것과 죄악시하는 것이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또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으셨습니다. 위험천만하며 가난하고 궁핍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살기 힘든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몸부림쳐야 했습니다. 열심히 움직여 일해야만 겨우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수십 년이 지나고 상황이 훨씬 좋아졌지만 이때 가졌던 의식은 계속 유지되리라 생각합니다. 사람은 어릴 적 부모나 주변 사람을 통해 배우는 전통, 예절, 규율, 도리, 선악에 크게 좌우되는 것 같습니다. 한국 사람의 근성, 일 처리 속도는 세계가 알아주지 않습니까.

전도사로 여러 교회를 섬기며 느낀 점이라면, 의욕적으로 주의 일을 하도록 부추긴다는 것입니다. 많은 일을 벌이고 부서를 성장시키고 여러 일과 사람에 관여하도록 말입니다. 되든 안 되든 시도하고 열심을 다하고 노력하자는 등 부추김을 받습니다. 공감하실 분도 있고 원래 교회가 그렇다고 하실 분도 있을 겁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라는 명분이 있음으로 모든 것이 통용되고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것이 하나님의 가르침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강단에서 열심히 주의 일을 하자고 선포되고 있을까요? 왜 예배 참석과 헌물 그리고 여러 봉사나 헌신 등이 강요될까요? 교회 안에 거듭난 새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듭나기 전과 후의 차이는 매우 큽니다. 거듭난 새 사람은 속에서부터 주의 나라를 향한 열심이 불붙습니다. 자연히 헌신적인 모습을 나타내지요. 이런 이들이 여럿 모이면 교회는 역동적으로 변합니다. 만약 교회에 수동적인 사람만 모여있는 것 같으면 그들이 아직 거듭나지 못한 것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밖에도 어떤 율법적인 요소들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주일 성수. 주일에 꼭 예배에 참석해야 하는 것과 주일에 돈을 쓰면 안 된다는 가르침이 어느 교회엔 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복음을 믿는 이들에게는 자유함이 있어야 합니다. 만일 주일 성수하는 것과 구원을 같이 논한다면 심각한 율법주의에 속합니다.

전도 주일, 전도 집회. 한 사람당 꼭 한 사람을 데려오자는 메시지는 좋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말씀하시는데, 목회자가 성도에게 부담스러운 짐을 지우는 게 과연 합당한가 고민해봐야 할 것입니다.

헌금 강요. 자연스럽지 않고 조건이 달린 메시지는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뭔가 부족하셔서 사람에게 도움을 받으셔야 하는 분이 아닙니다. 억지로 드리는 헌물은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부흥회 같은 때 헌금 시간을 많이 집어넣고 축복받으라 하며 강제성 헌금을 많이 종용하고 있습니다. 이 일도 성도에게 부담스러운 짐을 지우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 봉사. 일꾼이 없는 자리가 있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강요하면 안 됩니다. 봉사의 일은 하나님의 감동이 임하여 자발적으로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맡겨야 합니다. 봉사자가 기뻐하지 않고 투덜거리며 일한다면 상급이 쌓이다 깎일 것입니다.

소그룹 활동. 성경 공부나 큐티 나눔을 위해 모이는 그룹에서 일일 과제가 주어집니다. 다 같이 하는 일에서 자신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기는데, 이것이 어떤 사정이나 형편으로 못할 경우 죄책감이 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 강단에서 순전한 복음이 선포되게 하기 위해서는 목회자의 자기 성찰, 자기의 뜻 자기의 소원 내려놓기, 사역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깊이 살피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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