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 혹은 고독의 선지자라고 불립니다. 아나돗의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로 태어나, 요시야 13년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에게 그런 별칭이 붙은 이유는 유난히 괴로운 일을 많이 당한 것도 있지만, 곧 심판의 때가 이른 동포에 대한 연민으로 많은 눈물을 흘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식하기에 선지자는 크신 하나님의 종으로 매우 존경받는 위치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생전에 그러한 대접을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심한 박해의 대상이었습니다. 별다른 상황이 없었더라면 예레미야는 제사장이나 역사가로서 무탈하게 지냈을 것인데 시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망해가는 나라에 심판의 뜻을 전하는 사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고국이 폭력에 짓밟히는 시기에 쓴소리를 내는 선지자라니, 안 봐도 그림이 그려집니다. 바벨론에 투항하라는 그의 메시지는 백성이 수용할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인간은 이성적이기를 희망하지만 결코 이성적이지 않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자신들이 왜 그런 일을 당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들이고 자국의 역사가 처음부터 일관되게 가르치는 바이니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성이 깨달아도 감정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인정할 수 없는 말을 내는 예레미야에게 증오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를 죽여서라도 그의 말을 무로 돌리고 싶어 했습니다.
예레미야의 삶은 험난하고 고독했습니다. 부드럽고 사랑 많은 성정과는 반대로 냉혹하고 두려운 심판의 선언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도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기쁘게 해 줄 소리를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넣어주시는 말씀을 전해야 선지자입니다. 멸망이 선고되었는데 평화를 외치면 그는 사기꾼입니다.
당시 선지자라는 이름으로 듣기 좋은 소리를 외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거짓을 말하며 선지자 행세를 하기에 '거짓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사탄의 수하입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요 속임수의 대가입니다. 사실 인간은 속임에 매우 취약합니다. 이성이 있어도 감정이 앞서서 상황을 판단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결과는 아예 부정해 버립니다. 예레미야가 전한 메시지가 그렇게 부정되었습니다. 반면 거짓 선지자들의 말은 달게 받아들였습니다. 바라던 바를 들려주니 얼마나 기쁘고 반가웠을까요.
예언의 진위는 시간이 판단해 줍니다. 시간이 지나면 누가 참인지 거짓인지 확실하게 나옵니다. 결과적으로 그 많던 선지자들은 소리소문없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거짓이 들통났으니 선지자가 아니라 거짓 선지자라고 해야겠네요. 예레미야를 핍박했던 각계각층의 사람들은 무엇을 느꼈을까요?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면 인간도 아닐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메시지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각자 핑계가 있겠지만 예레미야 시대와 차이가 없습니다.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게 하는 것입니다.
요시야의 개혁에 대해 생각할 때 거의 성과가 없었다고 보입니다. 그는 언약책을 발견하여 읽고 사람들에게 들려주며 우상과 제단을 파했는데 후에 뒤따르는 열매가 없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그렇게 많고 어두운 영적 상황은 여전하였습니다. 결과는 앞의 일에 대한 가장 충실한 설명입니다. 유다가 쌓아온 악행은 므낫세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했고, 그에 비해 정화를 위한 노력은 미미했습니다. 여호와의 종들이 마지막으로 회개할 기회를 깨우쳐 줬지만, 그들은 듣지 않고 오히려 박해했습니다. 유다의 멸망은 어리석고도 슬픈 결말입니다. 우리가 따라가지 말아야 할 길입니다.
- 강병도 편저, 「호크마 주석」, 기독지혜사
- 노우호, 「읽는 것을 깨닫느뇨?」, 에스라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