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가이드/성경 강좌

갈라디아서 서론

이원범 2022. 3. 12. 17:14

갈라디아는 바울이 1차 전도 여행 때 다녀간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입니다. 그곳에는 반대자들의 위협과 핍박이 있었지만,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인해 광범위하게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일차적으로 갈라디아에 속한 수많은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기독교 복음은 유대교의 가르침과 상충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삼는데 유대교는 율법과 할례,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면 의인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차이로 인해 복음을 들은 유대인들은 하나같이 극과 극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듣고 회개하는 무리와 극렬히 거부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제대로 미움을 산 바울은 생명의 고비를 여러 번 넘길 정도였습니다.

다른 케이스는 두 가지를 혼합한 양상의 부류가 있었습니다. 마치 한 발은 유대교에, 다른 한 발은 기독교에 걸친 식으로 말입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들이라고 합니다. 이름은 물론 어떠한 부분도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다만 잘못된 것을 가르쳤으므로 '거짓 교사'라고 부릅니다. 사도도 아닌 처지에 무슨 권위로 가르쳤는지 모르나, 예루살렘에서 왔다는 부분이 그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을 것입니다.

교회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도의 가르침을 폄하하고 율법주의를 가져온 것은 명백한 잘못입니다. 율법주의는 복음과 길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같이 갈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를 두고 다른 복음이라 하였고,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했습니다.

학자들은 이 서신을 '자유를 위한 대선언'이라 부릅니다. 율법에 얽매여 살 동안에 사람들은 자유가 없었습니다. 율법이 정한 것을 어기면 죽음뿐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의 삶은 그래서 자유가 없습니다. 늘 불안하고 두려울 것입니다.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어떨까요? 불안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확실히 덜할 것입니다. 구원이 행위에 달리지 않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에 달려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3~4장의 논증을 통해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명확히 하였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이야기하였습니다. 할례를 받겠다는 것은 자유를 버리고 다시 종이 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자칫 오해할 수 있어서 주의가 필요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단순히 받아들일 말이 아닙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우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따르는 삶을 살게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거룩하게 살지 못합니다. 곧 거룩한 삶이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주의자처럼 노예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를 누리고 살아갑니다. 율법은 인간으로서 절대로 다 지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따라서 행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죄를 이기고, 날마다 회개해서 거룩한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신약 시대에 들어 율법은 많은 논란과 오해를 야기하였습니다. 사도 시대에는 율법주의가 발목을 잡았고, 중세 시대에는 행위 구원이 문제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조금 이해가 갑니다. 오래전부터 율법과 삶을 같이 하였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들었어도 몸에 밴 의식은 떨쳐버리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율법은 그것을 지키라고 주신 것은 맞지만 더 큰 목적이 있습니다. 율법의 목적은 우리로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죄는 사망입니다. 구원을 갈망하는 죄인에게 유일한 해답은 복음입니다.


  • 강병도 편저, 「호크마 주석」, 기독지혜사
  • 조병호, 「성경통독」, 통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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