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는 과거 알렉산더 대왕의 모국 마게도냐의 중심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전에는 도시 남쪽에 금광이 자리하여 큰 부를 누렸다고 합니다. 이곳에 세워진 교회는 바울이 환상을 보고 마게도냐로 나아가 옷감 장수 루디아를 만난 일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으로 인한 소동도 결신자를 얻게 되는 좋은 계기였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선교하는 데에 필요한 재정을 후원할 정도로 그와 사이가 각별했습니다. 그러하였기에 바울이 갇혀있다는 소식을 듣고 침통한 마음을 가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니 큰일이야 없을 줄로 믿었겠지만, 염려와 슬픔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바울은 마음의 짐이 되지 않도록 평소보다 밝게 기쁨과 감사를 전했습니다.
바울은 비록 몸은 갇혀있되 자유로운 영혼이었습니다. 열악한 상황에 놓였어도 자기 삶을 비관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보다 사랑하는 성도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성령께서 동행하시며 믿음을 붙드시는 사람에게 이런 여유가 생기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옥에 갇혔지만 이것이 우연한 일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는 옥에 갇히지 않았다면 복음을 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옥에 갇혔어도 복음을 전할 수 있으니 그에게는 이 상황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극한의 상황에 놓으시면서 그것이 복이 되게 역사하십니다. 우리 편에서 생각할 땐 악재인데, 하나님 편에서는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인 것입니다. 바울의 투옥은 하나님께서 구원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계획하고 이끄신 결과라고 여겨야 합니다. 다른 수단도 많을 텐데 하필이면 감옥이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종이 주인의 말을 듣고 주인의 뜻에 따라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항상 생각이 많습니다. 계획 세우기를 좋아하고, 생각할 필요가 없는 미래까지 너무 앞서서 고민합니다. 그리고 편견이 있습니다. 세속적 관념 혹은 합리주의에 입각한 사고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지나치게 똑똑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대해 "예"라고 하기보다 "왜요?"라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나름대로 무엇이 더 나을까 고민하는 것인데 그것이 문제입니다. 종은 주인에게 그럴 수 있는 신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바울은 그리스도께 초점을 모아서 그가 얼마나 겸손하셨는지 이야기합니다.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라고 조언합니다. 특정하기 어려운 어느 무리를 조심하라고 당부합니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받아야 할 것은 할례가 아니라 회개로 말미암은 성령 세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구분하는 표는 우리 안에 성령의 내주하심입니다.
우리는 모두 고난에 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고난을 피하려 하는 것은 과한 욕망입니다. 하나님은 다수를 구원하려는 뜻을 가지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다수를 구원하려 하셨다면 아주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고난을 안 내리시면 됩니다. 그럼 교회는 가히 폭발적인 인기를 누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백성은 소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그 소수만이 통과할 수 있도록 심히 어렵습니다. 고난이 거세거나 길어질 때 탈락자들이 속출합니다. 대부분 원망 불평하며 믿음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힘들다고 포기하지 맙시다. 우리는 상을 기다리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좋은 것을 곧 누릴 텐데 여기서 넘어지면 안 됩니다.
- 강병도 편저, 「호크마 주석」, 기독지혜사
- 하용조 편찬, 「비전성경사전」, 두란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