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가이드

죄성의 뿌리, 교만

이원범 2020. 2. 18. 17:58

요즘 사회 기사들을 보면 사람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분이 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소위 갑질에 관한 주제가 그것이다. 매스컴에서 갑질에 관한 내용이 오를 때마다 국민들은 크게 분노하며 광장에 나아가 한 목소리로 척결과 타도를 외친다. 갑질은 기본 윤리나 도덕률에 반하며 국민의 정서를 해치고 있다. 이 용어가 등장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이전에 갑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권력에 의한 횡포는 역사 이래 이어져 왔으며 무수한 반복을 거치며 셀 수 없이 많은 고통과 불행을 낳았다.

우리 사회의 갑질은 부를 획득한 사람이 대대로 부를 이어가고 자본의 힘으로 자본을 끌어 모으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법적 지위는 아니지만 이해관계에 따라 형성된 갑의 지위는 마치 계급처럼 효력을 갖는다. 갑은 물권을 틀어쥔 채 고압적인 행태를 유지하고, 을은 가지지 못한 사람으로서 저자세로 끌려 다닌다. 이렇듯 우리 사회는 모두가 평등하게 대우받는 공정한 세상이 아니다. 그럼 이제부터 갑질의 배후에서 역사하는 교만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교만은 사회 전반에 퍼진 악성종양 같은 죄악이다. 정치, 재계 등 힘을 가진 집단은 물론 지역단체, 학교, 노인정, 복지단체 같은 평범한 집단도 예외가 없다. 심지어 어린아이들이 모인 놀이터마저 그것을 발견한다. 사전적으로 교만하다는 말은 잘난 체하고 뽐내며 건방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교만의 의미를 매우 축소시켜 놓은 것으로 충분한 설명이 아니다. 그런 교만한 사람은 매우 흔히 볼 수 있으며 아주 나쁜 행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도 대중적으로 교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여겨진다.

성경에서 교만은 이보다 더 나쁜 의미가 담긴 말이 없을 정도로 악의적인 표현이다. 교만의 시초는 타락한 천사, 마귀다(사 14:12~15). 그는 본래 하나님 나라의 수행원으로 창조된 천사였으나 하나님과 동등해지려는 마음을 품고 버림받았으며 저주가 임했다. 마귀는 교만을 품는 순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했던 그의 행위를 두고 성경은 교만하다고 평가한다. 여기서 미루어 교만은 사탄적인 마음의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나 몸으로 하는 행동은 먼저 마음에 품은 후 나온다. 곧 흉포한 말과 갑질 같은 사례는 교만한 마음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교만으로 인한 죄는 죄질이 악하다. 사탄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보통 죄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로서 명확한 질서가 세워져 있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그를 섬기는 것이 기본 바탕이다. 하지만 교만은 그 기본 질서를 어지럽힌다. 교만이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마음 상태이기 때문에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교만은 우상숭배 죄와 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온다(사 2:11, 17).

교만의 어원

[영어]

  • pride: 자긍심, 자만, 교만, 긍지, 오만
  • haughtiness: 건방짐, 오만
  • arrogance: 오만, 거만, 방약무인
  • loftiness: 우뚝 솟음, 고상함, 고결, 숭고
  • boasting: 자랑, 과시, 호언장담

[히브리어]

[헬라어]

  • ὑψηλοφρονέω: 교만하다, 거만하다
  • φυσιόω: 부풀게 하다, 부풀어 오르게 하다, 잘난 체 하다, 교만하여지다
  • φρυάσσω: 거만하다, 교만하다, 콧바람 치다, 소란 피우다, 발을 구르다, 격노하다

교만함의 특성

1) 자아도취

객관적으로 어떤 특출난 장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발견된다. 외모가 아름답다거나 예술적 감각이 탁월해 사람들의 찬사를 받는 경우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OO한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쉬우며 단점이나 나약한 부분에 대해선 깨닫지 못한다.

2) 우월감

자아도취와 비슷한 면을 가진 특성으로, 이 경우는 자신을 상대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어려서부터 출중한 능력을 타고났으며 항시 누군가와 비교하면서 우월감에서 오는 만족을 얻는다. 본인은 남들이 넘볼 수 없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여기며 아무도 자신을 앞서 갈 수 없다고 여긴다. 타인을 대할 때 우월감에서 오는 자만이 드러나며 경멸하거나 얕잡아 보는 태도를 취한다.

3) 하나님과 동일시

교만이 정점에 다다르면, 자신을 예수님과 같은 선상에 올려놓으며 자신을 하나님이라 하거나 메시아나 보혜사라고 칭한다.

4) 자립심

자기 뜻대로 하고자 하는 성향이 강하여 하나님의 도움이나 간섭은 배척한다. 필시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며 하나님 없이도 충분히 잘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살아간다.

5) 자기 존중

삶의 모든 초점이 자신에게 맞춰져 있다. 누군가의 개입이나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삶을 원치 않는다. 매사에 자기 의지가 중요하며 중요한 결정을 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뜻 외에 다른 것은 배제한다. 자신을 존중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분노를 느낀다.

6) 자기애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마음이다. 자신을 가장 사랑하고 아끼며 행복한 삶을 추구한다.

7) 야망심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만들려는 마음이다. 명예욕이 많으며 사람들의 기억에 어떤 식으로든 남고 싶어 한다. 유달리 튀는 행동이 잦고 나서기를 좋아한다. 하나님께 돌릴 영광도 전부 자신이 차지해 버린다.

8) 자기의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마음이다.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하여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자신의 의로운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천국에 능히 받아주실 것이라 기대한다.

9) 반항심

하나님의 말씀에 곧바로 순종하지 않는다. 핑곗거리를 만들어 회피하거나 못하겠다며 퇴짜를 놓는다. 더불어 다른 사람의 말도 잘 듣지 않고 귀를 닫아버린다. 툴툴거리는 반응을 자주 보이며 남들 의견에 쉽게 수긍하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 자신을 거스르면 정색하고 달려든다.

10) 왕처럼 군림

자신이 왕이 된 것처럼 행세한다. 무리를 장악하여 자신의 뜻에 복종하게 만든다. 자신의 비위에 안 맞으면 곧바로 화를 내며 불이익을 내린다. 모든 것이 자신의 마음에 들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심기가 뒤틀린다. 명령과 고압적인 말을 일상적으로 한다.

성경에서 교만하다고 평가된 인물들

1) 바로

출애굽기 5~14장에 등장하는 바로는 고대 이집트의 군주로서 태양신의 아들로 추앙받던 사람이다. 그의 나라는 부강했고 최고 권력자로서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았다. 이렇게 모든 것이 넉넉히 갖추어진 상황은 교만에 휘어잡힐 가장 이상적 조건이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은혜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것이라 설명한다(출 7:3). 그는 선택 받지 못한 자였고 그런 연유로 계시가 명백히 주어졌음에도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였다. 세상의 축복을 많이 누린 것에 비해 영적인 축복은 거의 못 받았다. 열 가지 재앙을 겪고도 하나님의 높으심과 권세를 인정하지 않은 그는 끝내 홍해에 빠져 죽음에 이른다.

2) 아히도벨

밧세바의 조부이며 다윗에게 신임받는 모사였다. 그의 명성은 실로 대단하였다. "아히도벨이 베푸는 모략은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이라"(삼하 16:23)는 말이 나올 정도면 말이다. 그는 당대 최고로 뛰어난 지성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분명 이스라엘이 강성하도록 복을 받은 인물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는 실패한 인물로 구분된다. 그의 실패 원인은 교만이다. 다윗 곁에 계속 남았더라면 좋은 평가가 유지되었을 텐데 그는 압살롬 편에 서는 것을 택했다. 자신의 조언만 잘 따른다면 압살롬이라도 다윗을 이길 것이라 자부했다. 한계가 명확한 인간적 지혜와 쌓아온 관록을 믿었다. 처음에 압살롬은 그에게 의존하며 순종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고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결과 아히도벨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하며 자결했다.

3) 나아만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주변 강대국 중 하나인 시리아의 장군이었다. '그는 큰 용사'라는 설명에서 전쟁에 능한 영웅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그의 공적이 얼마나 출중한지 왕이 그를 존귀히 여겼다. 세력 다툼이 빈번히 발생하는 정세 속에 유능한 군지휘관은 대단히 존귀하다. 그는 유능한 사람이었기에 교만해질 가능성이 있었고 실제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런 그에게 숨기고 싶은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나병이었다. 나병은 불치병이며 매우 끔찍한 질병이다. 그래서 엘리사를 찾아가 병고침을 구했는데 돌아오는 응답을 듣고는 분통을 터트렸다. 나와서 환대하거나 치유에 적합한 행동을 하지 않는 엘리사의 태도에 말이다. 그는 자신이 존중받는다고 느끼지 못했다. 치유 방식에 대한 편견으로 성령님의 일하심을 제한하였다. 교만하면 하나님의 은혜마저 자기 입맛대로 받으려 한다.

4) 히스기야

남유다의 대표적인 선왕으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아하스와 달리 우상숭배를 배격하였고 백성이 여호와 신앙을 회복하도록 일조했다. 열왕기서는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라고 평가하였다. 하지만 최종적인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말년에 가서 안 좋게 변했기 때문이다. 발단은 예루살렘을 둘러싼 앗수르의 18만 대군이 하룻밤 사이에 괴멸한 사건이 있고 난 후이다. 약소국이 초강대국을 상대로 거둔 이 승리는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이변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히스기야는 앗수르를 두려워하던 주변국들의 희망으로 떠오르며 뜨겁게 추앙을 받았다. 그런 축복 속에서 교만이 싹 틔기 시작한 것은 이상할 일이 아니다. 바벨론에서 사절단이 방문했을 때, 자신의 위명이 먼 타국까지 전해진 일에 고취된 히스기야는 자기 금고에 쌓인 보물과 군기고, 창고의 모든 것을 보이며 자랑했다. 이 밖에 왕위를 물려준 후계자가 희대의 폭군, 므낫세였다는 점이 결점으로 남는다.

5) 웃시야

웃시야가 재위하던 때는 남북왕국이 제2의 전성기라 불릴 만큼, 강한 국방력과 더불어 내실 있는 성장을 이룩한 시기다. 그의 업적은 적대세력인 에돔, 블레셋, 아라비아, 마온과 싸워 이겼으며 군사 요지 엘롯의 재건, 농업 증진, 군비 증강 등 다양하다. 그는 백성이 바라는 매우 이상적 자질을 갖춘 군주라 여겨진다. 그의 명성은 널리 퍼져 나갔고 정치적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교만이 찾아왔다. 스스로 여호와께 분양을 드리려 한 것인데 이는 제사장에게 위임된 일이었다. 그는 자기 존중이 과한 나머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힌 것 같다. 제사장의 업무를 수행함으로써 사람들 앞에 자신을 과시하고자 했다. 결국 여호와께서 징계하심으로 나병에 걸렸다. 남은 여생을 홀로 별궁에 거주해야 했다.

6) 하만

아각 사람 함무다다의 아들로 페르시아 제국의 총리였던 사람이다. 페르시아는 전성기 때 동쪽의 인더스 강, 서쪽의 애굽, 남쪽의 티그리스 강, 북쪽의 카스피 해까지 이르렀을 만큼 위세가 강했다. 서남아시아를 제패한 거대 제국이었다. 그는 제국의 총리 직책을 맡았던 사람이며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그러니 그가 교만해지지 않을 이유가 있었을까. 하만은 자신에게 절을 하지 않는 유다인 모르드개가 심히 거슬렸다. 교만하지 않다면 그게 그렇게 기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모르드개에게 분노한 하만은 그를 응징하고자 유다인 전체를 몰살시킬 흉계를 꾸몄다. 모르드개를 잔혹하게 죽이려고 거대한 장대를 준비하기도 했다. 그의 교만함은 왕이 되어 사람들 사이에 군림하려는 것이었다. 위세를 드러내기 좋아하고 자신을 권세자로 착각하고 원하는 바에 따라 상벌을 부여한다. 실제 왕은 아니지만 이미 마음으로 왕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뜻은 성취되지 못했고 오히려 자기 꾀에 넘어가 비참한 죽음 맞이한다.

7) 느부갓네살

바벨론 제국의 2대 왕으로, 고대 근동 세계를 제패하고 바벨론의 황금기를 가져온 인물이다. 그는 예루살렘을 공략하고 성전을 허물었으며 시드기야의 눈을 뽑고 잡아가는 등 손속이 잔혹하였다. 도성 바빌론은 감히 쳐들어올 엄두가 나지 않는 천별의 요새였으며 각지에서 데려온 인재들, 왕비 아미티스를 위해 만든 공중정원, 휘황찬란한 마르두크 신전, 내실 있는 상공업은 나라의 발전상을 보여주었다. 그 시대에 세워진 이시타르 성문은 지금까지 유적으로 남아있다.

하루는 그가 왕궁 위를 거닐며 쌓아 올린 업적들로 마음이 부풀어 있을 때 하나님의 징계가 내려왔다. 그는 반미치광이처럼 변해 풀을 뜯었고, 머리카락이 독수리 깃털처럼, 손톱은 새 발톱처럼 자랐다. 사람들에게서 쫓겨 들판을 헤매며 짐승처럼 살았다. 그의 교만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전부 자기의 위대함으로 삼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으며 스스로를 찬양했다. 교만하면 가장 높으신 이를 잊어버리고 자신을 가장 높은 존재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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