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가이드

성경적 축복관

이원범 2020. 2. 18. 17:26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들은 대부분 복을 누린 사람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복의 대명사격 인물로, 그 자신이 복이 되는 축복을 받았다. 그리고 당대의 거부로서 가나안의 왕들 못지않은 힘을 가졌고 존재감이 대단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에 누구도 그를 해하거나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는 복을 누린 사람이었다.

열국의 아버지라는 그의 이름은 그저 허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소유 삼으신 이스라엘이 그의 후대 민족이었으며, 세상 죄를 담당하시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계보로 나셨기 때문이다. 정말 대단한 복을 받은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너무 부러워할 필요는 없으리라 본다. 우리 믿음의 자녀들도 아브라함만큼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이미 받았으며 누군가에게 그것을 전달하는 자들이다. 당장 내게 아무 것도 없어도 믿음으로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주님께 받은 축복은 평생 소중히 여기고 감격할 기쁨의 제목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한쪽으로 치우친 복의 개념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 사람들을 혼란케 만들고 있다. "예수 믿으면 복 받아 하는 일마다 잘되며 부자가 된다"라는 것이다. 정말 이것이 사실인 것처럼 본인의 믿음과 부귀영화를 자신 있게 간증하는 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리고 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 자연스럽게 부가 따라올 것이라 주장한다.

교회 안 다니는 사람도 귀가 솔깃해질 듣기 좋은 메시지가 아닌가. 이는 반대로 독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어도 물질의 복을 못 받으면 제대로 신앙생활한 것이 아니라는 판단이 내려지기 때문이다. 교회 강단에서 바른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바로 이러한 혼란을 야기하게 된다. 다른 것은 배제하고, 육신적 욕망을 충족시키며 삶의 풍요와 안정을 가져다주는 부가 하나님의 축복이라 묘사되고 있다면 그것은 기복신앙이지 복음의 메시지는 아니다.

물질의 복만 추구하는 것은 바른 기독교 신앙이라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부에 관한 추구를 탐욕으로 여기며, 물질을 죄악시 여겨야 하는가? 그것도 아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축복은 다음의 것들을 포함한다.

신명기 28장에 기록된, 땅에서 얻을 축복의 목록.

  • 존귀히 여김을 받게 된다.
  • 자녀의 일이 형통하다.
  • 풍성한 재물을 주신다.
  • 대적자를 이긴다.
  •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

그 밖에 복에 관한 기록.

  •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복이라 고백했다(시 16:2).
  • 허물과 죄를 회개하여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시 32:1; 롬 4:6~8)
  • 지혜와 명철을 얻는 것(잠 3:13, 18)
  • 여호와를 경외하고 기뻐하는 것(시 2:12)
  • 여호와께 의지하고 그분께 자기의 소망을 두는 것(시 146:5; 잠 16:20)
  •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엡 1:3~7)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백성에게 주기 원하시는 복은 완전하며, 흠이 없고, 아름답다. 사람도 누군가를 위해 진정으로 마음을 담아 선물할 때 깊은 감동과 행복을 전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선물이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신 것이라면 좋지 않을리 없다. 축복은 우리가 믿음을 지키고 마지막까지 인내하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할 이유가 된다.

다만 받는 입장에서 준비해야 할 몇 가지가 있다.

사랑. 마음에 사랑이 채워져 있지 않으면 부의 사용이 어떻게 될지 금방 짐작해 볼 수 있다. 아마도 자신을 위한 용도로 사용될 것이며 주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다.

겸손. 마음이 겸손하지 못하면 스스로 높아져 권세를 남용하는 등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이는 주의 종으로서 결격사유에 해당하므로 재물의 복을 못 받으니만도 못한 결과다.

순종.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서 갖추어야 하는 덕목이다. 하나님께서 부를 주신 데에는 뜻하신 목적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에 응답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일을 처리해 나가야 할 것이다.

내세에 받을 복과 영적인 복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하지만 땅에 속한 복은 그것과 다르게 취급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타락 가능성 때문인데, 이 땅에서는 누구라도 온전하다고 볼 수 없다. 물질이 많으면 탐욕으로 인해, 하는 일이 잘 되고 높아지면 교만으로 인해 변질되는 사례가 얼마든지 나온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경고하시길,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셨다(마 19:24). 이 말씀은 물질로서 오는 부정적인 영향을 경계하라고 주신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물질적 부와 성공은 인간의 연약한 본성을 정확히 타겟팅하여 교만의 본색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자극한다. 야베스가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라고 기도하던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상황에 따라 변덕스럽게 오르내리는 우리의 내적 상태를 경계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랑과 겸손, 순종이 강조되는 이유는 바로 우리 안에 숨겨진 교만의 본성 때문임을 명심해야 한다.

물질적 부에 약했던 인물들

1) 롯

아브라함의 조카이며 그와 함께 가나안으로 이주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덕분에 거부가 되었고 가축과 장막이 너무 많아 분가해야 할 형편에 놓였다. 거주할 장소를 놓고 궁리하던 중 그는 요단 땅이 마음이 들었다.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처럼 풍요로워 살기 좋은 장소로 보였던 것이다.

그 땅은 신앙적으로 볼 때 죄악이 가득 들어찬 지역이었다. 불과 유황 심판으로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가 바로 이곳의 도시들이다. 롯과 더불어 그의 두 딸은 심판의 때에 구원을 입었지만, 이후 딸들과 교합을 벌이는 수치를 남겼다.

2) 아간

유다 지파 갈미의 아들로 소개되는 아간은 여리고성 점령 시 전투에 참여했던 이스라엘 자손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의 중대한 실수는 탐심을 주체하지 못해서 하나님께 바쳐질 재물을 도둑질한 행위다. 그가 차지하려 했던 물건들은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 금덩이 한 개, 은 이백 세겔이었다. 그날의 전투는 이스라엘의 명백한 승리였기에 눈 앞의 전리품을 보고 탐욕이 발동했던 사람은 그 사람 혼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에 이기에 하신 분이 하나님이요, 하나님께서 전리품을 모두 바치라 명령하셨기 때문에 나머지 백성은 그 말씀에 순종하였다. 하나님은 순종할 때 이기게 하시며, 때가 되었을 때 물질의 복도 허락하시는 분이다. 아간이 만약 물욕을 참고 오래 인내하였더라면 그와 그의 온 가족이 복을 받았을 것이다.

3) 발람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 자손을 저주하기 위해 고용했던 메소포타미아의 유명한 점술가이다. 그는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며 불법을 따르는 자이다. 실제로 그에게 먼저 임했던 계시는 모압 왕의 부름을 받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하지만 모압 왕이 제안하는 부귀영화에 이미 넘어간 발람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 소욕을 쫓아 행했다. 비록 그의 입에서 저주가 아닌 축복의 선포가 나왔지만 칭찬할 부분은 전혀 없다. 그는 이스라엘을 넘어 뜨리려고 더러운 술수를 사용했고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불의의 삯을 사랑했던 그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죄악 된 일을 행했고, 원하던 부귀영화가 아닌 죽음을 맞이했다.

4) 엘리멜렉

자세한 기록은 나와있지 않지만 유다 지파 베들레헴 출신이다. 그는 가나안에 기근이 들었을 때 집과 토지를 처분하고 모압 지방으로 이주했다. 그의 가족은 그와 아내, 두 아들과 두 며느리 총 여섯이었는데 거기서 십년도 못 살고 그 본인과 두 아들이 죽음을 맞이했다. 남겨진 그의 아내와 며느리가 룻기의 주요 인물들이다.

그의 죽음과 가족들이 겪은 고통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해 주는가? 한 가장의 잘못된 선택이 불러온 참담한 결과라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땅은 하나님의 기업이기 때문에 여간해선 매매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기근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없기에 섣부른 판단은 어렵지만 그 땅을 팔고 떠난다는 것은 하나님 곁에서 벗어난다는 의미가 되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소유로 삼으신 백성이기에 그렇다.

아마도 평온한 시절에는 하나님을 잘 섬겼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불리한 쪽으로 흐르자 돌변하여 하나님을 외면하였다. 그의 이름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하지만 이름대로 살지 못한 인물이었다.

5) 들릴라

소렉 골짜기에 살던 블레셋 여인이다. 그녀가 창녀일지는 확실히 밝혀진 바가 없다. 아무튼 삼손은 그녀의 거처에 머물러 사랑의 교제를 나눈 듯 보인다. 블레셋 방백들에게 있어 삼손은 눈엣가시처럼 거슬리는 존재였다. 그렇지만 그는 무시무시한 괴력을 지니고 있어서, 함부로 덤빌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삼손을 죽일 계책을 강구하던 그들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들릴라였다. 그녀는 블레셋 출신인 데다 별로 대단치 않은 평민이기에 그들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들릴라가 그들의 모의에 가담하게 된 정황이 돈을 원해서 인지, 협박에 굴해서 인지, 혹은 애국심으로 그리 결정했는지 제삼자의 입장에서 정확히 가리기란 어렵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들릴라에게 삼손을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 어떤 회유나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을 것 같다. 애국심 마저도 사랑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다.

6) 나발

갈렙 가문에 속한 사람이며, 지혜롭고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두고 종들과 수천의 가축들을 거느린 부자였다. 누구나 존경해 마지않는 갈렙의 후손이며 인품과 미모를 갖춘 아내가 있다는 점에서 그는 대단히 큰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행실은 하나님의 축복과는 거리가 멀다. '어리석은'이란 뜻을 가진 그의 이름처럼, 그는 어리석었고 베풂에 인색하였다. 다윗을 향한 모욕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술에 취해서 그런 과격한 소릴 했나 싶기도 한데, 그의 심성이 원래 악하다는 사실은 종들도 이미 아는 사실이었다.

아비가일이 중재에 나서서 다윗에게 용서를 빌었기 때문에 보복은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셨다. 나발은 받았던 축복에 비해 사랑이 부족했고 은혜 갚기나 베풂에도 인색했다. 그는 부를 소유하기에 한참 모자란 사람이었다.

7) 아합

북왕국이 비교적 안정기로 접어들 무렵에 통치했던 왕으로, 정치적으로도 유능한 편에 속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를 이전 왕들보다 더욱 악하게 평가한다. 그의 대부분의 행적은 아내 이세벨과 공모한 것으로 나타난다. 누가 더 주도했는지를 따져보면 이세벨이 월등히 앞서고 있다. 아마도 이세벨이 아합을 나쁜 길로 이끌었으리라 여겨진다. 하여튼 두 사람의 공로로 이스라엘이 역사상 가장 지독한 우상숭배에 빠져들었으며 여호와의 진노로 3년 간 땅에 비가 오지 않았다.

아합의 가문은 죄가 가득하여 멸절을 눈 앞에 두게 되었는데,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이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다. 그는 왕궁 곁에 나봇 소유의 포도원을 보고 탐심에 사로잡혔다. 그는 돈으로 거래를 시도했지만 나봇이 이를 거절하자 상심에 빠졌다. 그 모습을 본 이세벨이 악한 계략을 써서 나봇을 살해하고 포도원을 탈취하게 된다. 결국 아합과 그의 집에 여호와의 심판이 내려졌다.

8) 아나니아와 삽비라

두 사람은 부부이며 한날에 죽임을 당한 비운의 성도이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는 유대인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생산활동을 거의 벌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몸만 달랑 있는 타지인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넉넉한 사람이 자신의 부로 어려운 이들을 도왔다.

이 같은 헌신적 행위는 모두에게 칭송받아 마땅한 일이기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그 대열에 동참하기로 했다. 하지만 막상 재산을 팔아 바치려니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얼마를 감추고 전부를 바친 것처럼 가장했다. 베드로는 이들 부부의 행위를 성령을 속인 죄로 규정했다. 그들이 하나님께 서약한 금액은 소유를 판 금액 전부를 드린다는 것이었다. 이는 하나님과의 약속이며 맹세이기 때문에 얼마를 감춘다는 것은 약속을 어기는 행위며 거짓된 맹세임을 가리킨다. 성령을 속인 두 사람은 죽음으로 속죄받아야 했기에, 그날 두 사람은 함께 목숨을 잃었다.

위와 같은 사례에서 교훈을 얻어 우리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이처럼 물질은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훌륭한 가치를 지니면서, 동시에 삶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믿음의 자녀들이 재물과 성공으로 나태해지고 교만해져서 추태를 부린다면 이는 하나님께 불명예가 되는 일이므로 조심해야 한다. 이 경우, 현세의 복이 오히려 독으로 작용한 것과 같다.

영적인 복은 최대한 크게 받되, 물질의 복은 감당할 분량 만큼 적당히 받는 편이 가장 복된 삶일 듯싶다. 누구든 재물이 많기를 바라는 건 당연하겠지만 그것도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모두에게 동일한 재물을 내리지 않으시며, 각 사람의 인생을 전부 다르게 계획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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