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가이드

정결을 논하다

이원범 2020. 2. 18. 17:07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복음의 진리에 근거하여 모든 죄악을 속함 받고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신학의 역할은 바른 복음을 명확히 제시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모두가 순종할 수 있도록 세세한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다. 신학이 바르게 진리를 드러내야 목회자가 이를 깨닫고 교회에 전할 수 있다. 곧 교회와 성도가 바르게 깨달으려면 신학이 바로 서야 함은 당연한 이치다. 반대로 교회와 성도가 하나님과 멀어져 어그러진 길로 잘못 행하고 있다면, 무엇보다 신학에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신학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하나님의 존재와 하신 일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성경은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며, 성령께서는 한결같은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그런 성경의 말씀이 효력을 나타내지 못한다면 원인은 다른 데 있지 않고 말씀을 풀어내는 신학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학은 하나님의 존전으로 더욱 깊이 나아가야 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분량에 이르도록 성장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택하신 백성을 성결케 하시려는 뜻에 집중해야 한다. 정결치 못한 자녀들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가르치려면 속죄 과정에 대한 상세한 이론과 논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구원을 위한 속죄만을 가르친다면 성도는 죄악의 올무에 묶인 상태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삶의 변화가 없으며, 하나님과의 교제나 축복도 늘 제자리걸음일 것이다. 그런 연유에서, 신학이 바르게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정결에 대한 이해로 나아가기를 소망한다. 내주하시며 우리로 성결케 하시는 분께 붙들리는 신학을 하고 싶다.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가 하나님 앞에 정결한 모습으로 서도록 정결과 속죄에 관한 논의가 충분히 진행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성경에서 정결이라고 쓰인 용어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깨끗함을 의미한다. 하나님 편에서 죄는 더럽고 부정한 것으로 여겨지며, 죄가 없거나 사해진 것을 두고 정결하다고 판단하신다. 혹은 죄가 아니어도 사람에게 해가 될만한 무언가가 있을 경우 부정하다 하시기도 한다. 이 경우는 질병이나 세균 감염을 예방하기 위한 이유로 보인다.

구약의 율법은 하나님의 의가 요구하는 기준을 제시하고 있으며, 우리의 행위에 따라 선과 악을 판별한다. 또한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나누며, 부정해질 때를 대비해 정결케 하는 예식을 소개한다(레 11~15장). 인간 편에서 생각하면 까다롭고 불편을 야기하는 조항들이 많이 나오는데 당시에는 어쩔 수 없이 따라야만 했다. 부정함을 제하지 않으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히는 행위가 되므로 무리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구약시대에서 정결은 구원과도 직결된 중요 사항이었다(민 19:20).

출애굽기 20장에 기록된, 언약 백성에게 주시는 열 가지 계명.

  •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 우상을 만들지 말며 섬기지도 말라.
  •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 네 부모를 공경하라.
  • 살인하지 말라.
  • 간음하지 말라.
  • 도둑질하지 말라.
  •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레위기 11~15장에 기록된,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규례.

  • 부정한 동물을 먹지 마라.
  • 부정한 짐승의 시체를 만진 자는 저녁까지 부정하다.
  • 여인이 아들을 낳으면 7일간 부정하며, 딸을 낳으면 14일간 부정하다.
  • 나병에 걸린 사람은 부정하다.
  • 유출병에 걸린 사람은 부정하다.
  • 설정한 사람이나 성관계를 맺은 사람은 저녁까지 부정하다.
  • 월경을 한 여인은 7일 동안 부정하다.
  • 월경기 외에 피를 유출하면 부정하다.

신명기 7장에 기록된,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명령.

  • 가나안 일곱 족속을 진멸하고 어떤 언약도 맺지 말라.
  • 그들과 혼인하지 말라.
  • 그들의 신을 섬기지 말며,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라.

의의 기준은 신약 시대에 들어서도 변하지 않는다. 우리의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하신 말씀이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덧붙여 설명하신 만큼 약간의 변화가 있었지만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율법은 여전히 죄를 죄로 규정하며 우리 행위와 생각을 선악 간에 판별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내세우면서도 율법을 부정하는 말은 전혀 하지 않는다. 율법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시대를 막론하고 선악을 판별하는 본연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율법의 의를 추구하든, 아예 부정하든 율법 앞에서 깨끗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만일 누군가 자신은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스스로를 속이고 또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라 성경은 말하고 있다(요일 1:8). 하나님은 죄인을 향해 부정하다 하시며, 종국에는 율법에 기록된 대로 심판하신다. 율법 앞에서 부정한 인간이 취해야 할 선택은 단 한 가지, 복음뿐이다. 

정결을 위해 재정된 여러 방편

1) 제사
구약시대에는 예배의 형태로서 제사가 드려졌다. 제사의 의미가 명확히 드러난 시기는 시내 산에서 율법을 전수받고 난 후이다. 모세는 제사에 관해 하나님께 들은 말씀을 레위기에 기록하였으며, 아론의 가문에 제사장 직책을 맡겼다. 레위기는 내용이 다소 지루하고 딱딱해서 다른 책들보다 읽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제사에 관한 일은 어물쩍 넘길 수 없는 중요 사안이기에 자세하게 반복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제사는 하나님을 향하여 인간 만이 행할 수 있는 거룩한 의식이다.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리거나 속죄를 위한 희생제로서 행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과 언약 관계 안에 있는 자의 마땅한 도리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행위이다. 속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필수 불가결한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죄는 부정한 것이요 하나님을 거스르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언약 안에 하나님과 늘 교통하며 지내려면 속죄가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속죄란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는 것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누군가 죄의 대가로 죽어야 함을 뜻한다.

그래서 제사를 드리려 할 때는 희생 제물이 있어야 하며 사람은 제물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죄를 자백한다. 그 후 제사장이 제물을 잡아서 번제단 위에 올려놓고 불사른다. 피 흘려 불꽃에 사그라진 제물과 인간의 상한 심령은 곧 하나님 앞으로 올려져 죄 사함을 이루는 것이다.

2) 물로 씻음
내면의 부정함이 제사로서 깨끗해질 수 있다면 겉의 불결함은 어떻게 씻을 수 있을까? 율법은 맑은 물로 몸을 깨끗이 씻거나 옷을 빠는 행위 등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시체로 인한 부정함을 대비해 '정결하게 하는 물'을 만들라 하였다. 이 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온전하며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매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가 희생 제물로 드려졌다(민 19:2). 곧 속죄제와 같은 성격임을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사례가 물로 씻는 예식이 활용된 경우다.

  • 부정한 동물의 주검을 만지면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입었던 옷을 빨아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 어떤 것의 주검이 나무 그릇에든지 의복에든지 가죽에든지 자루에 떨어지면 전부 부정하니 물에 담그고, 질그릇이면 깨뜨려야 한다(레 11:32~33). 그리고 부정해진 그릇에 음식이 담겼거나 마실 것이 담기면 같이 부정해진다(레 11:34).
  •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진 사람은 이레 동안 부정하며, 제사장은 미리 예비하였던 '정결하게 하는 물'을 그에게 뿌려 부정함을 제하였다(민 19:11~13). 

3) 피 뿌림
피 뿌림은 죄 없이 희생된 제물의 피를 바르거나 뿌리는 의식이며, 제사의식과 관련하여 등장한다. 피는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을 상징하므로 마시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으나 다음과 같은 예식에 사용된다.

  • 번제, 화목제, 속건제를 드릴 때 희생제물의 피를 제단 사면에 뿌렸다.
  • 속죄제를 드릴 때 성소의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며, 향단 뿔들에 바른 다음, 나머지는 번제단 밑에 쏟아부었다.   
  • 제사장 위임식을 행할 때 희생제물의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위임받을 자의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쪽 엄지 손가락과 오른쪽 엄지 발가락에 발랐다.
  • 나병 정결예식을 행할 때 산 새의 피를 나병이 나은 사람을 향하여 일곱 번 뿌려 정하게 하였다.

4) 털을 민다
정결 예식에는 전신의 털을 삭도로 미는 행위도 포함된다. 이는 정결 과정의 일부로서 하나님 앞에서 깨끗이 여겨지기 위한 방편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우리 몸에 난 털은 부위마다 특별한 역할을 가지고 있는데 동시에 전혀 필요하지 않은 털들도 많다. 그리고 악한 영들이 몸을 덮고 있을 때 마치 지저분한 털들이 몸에 가득히 난 것처럼 보인다. 털이 정결치 못한 이유는 이를 테면 악한 영들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쓰임새는 다음과 같다.

  • 나병에 걸렸던 사람이 정결예식을 치르면서 모든 털을 밀었다.
  • 레위인을 데려다가 정결예식을 치르면서 그들의 전신을 삭도로 밀게 했다.
  • 나실인이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린 날에 그의 머리털을 밀었다.

5) 핀 숯
이것은 이사야가 경험한 유일한 사례로서, 일반적으로 행하는 방법은 아니다. 환상 중에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간 이사야는 자신의 부정함을 직감하였다. 그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탄식했다(사 6:5).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다. 이사야의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받으셨고, 곧 여섯 날개를 가진 세라핌이 제단에서 집은 핀 숯을 가져와 그의 입에 대며 더러움을 제하여 주었다.

6) 베데스다
베데스다는 예루살렘 성 바깥에 마련된 저수 시설이다. 헬라어로 '자비(은혜)의 집'이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신약 시대에는 치병 효과로 많이 유명했다. 실제로 그 물에 닿으면 부정함이 사라지고 질병까지 치유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돌봄으로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다만 모든 사람에게 효과가 발현되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물이 일렁이면 그때가 치유가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든 나았다. 비록 오늘날까지 이어지지 않으며 희귀한 케이스이긴 하지만 은밀한 중에 도움을 베푸시는 주님의 자상하신 손길을 느끼게 해 준다.

정결에 따른 축복

정결함에서 오는 유익은 그 어떤 것보다 값진 보화와 같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에게 계명과 규례를 주시고 정결한 삶을 요구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복 받고 행복하게 살도록 하기 위함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본래 정결하게 지음 받았다. 아름답고 성스럽고 고귀하며 지혜가 충만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품격이 느껴지는 존재였다. 지금은 많이 부족할지라도 그때로 돌아가기를 소망할 수는 있다.

◎ 정결함으로 인해 우리에 임하는 축복은 첫째로 건강이다. 건강이 삶의 행복도에 끼치는 영향을 고려한다면 정결은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할 가치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질병에는 사고, 스트레스, 과로, 면역력 결핍 등 여러 원인들이 있을 수 있는데 결코 정상적으로 보기 어렵다. 예수께서 부정한 귀신의 영을 내쫓으시고 병자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치유하셨듯이, 이로 보건대 질병은 부정함이요 곧 죄의 결과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을 정결케 하시며 질병에서 놓여나게 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고 부정한 죄악에 얽매여 사는 인생들은 악한 세력에게 공격받아 몸이 상하게 되는 것이다.

◎ 다음으로 임하는 축복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거하는 복이다. 건강하다고 해서 마냥 행복할 수만은 없다. 세상은 위험한 곳이며 언제라도 변고가 일어날 불안 요소들이 산재해 있다. 세상 사람이라면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만 언약 백성은 염려할 필요가 없다. 하늘 아버지께서 모든 걸 알고 계시며 돌보시기 때문이다. 거센 폭우가 내리고 폭풍이 휘몰아쳐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안전하며 두려움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이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기 때문이다. 언약 안에 거함은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라서 우리가 감히 근처도 가지 못할 줄로 생각하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니다. 기독교가 종교화 되어버리면 신앙이 형식에 머무르고 예전만 따르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속죄의 길을 우리에게 열어주신 이유는 무엇일까? 기독교를 종교로 만들기 위함은 결코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한결같이 자녀들을 향하고 있다. 아담에게 그리 하셨던 것처럼 사랑스런 음성으로 이름을 부르시며 교제하시기 위함이다.

구약에 나타난 정결케 하는 예식과 정결함이 주는 유익에 대해 살펴보았다. 부정한 죄인이 깨끗하게 회복되어 다시 하나님 앞에 서는 모습은 감격스럽고 기쁨이 넘치는 장면이다. 정결하게 변화되도록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참 뜻임을 알아야겠다. 그래서 복음이 회개인 것이다. 회개는 복음의 핵심이며 전부라고 할 만큼, 복음을 말하기 위해선 회개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복음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단순하다. 예수님께서도 이 한 구절에 복음의 진리를 담아내셨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복음을 들은 사람은 회개하는 사람이며 정결한 주의 신부로 단장하여 천국에서 주님을 만날 것이다. 이를테면 정결은 구원과 성화를 전부 아우르는 말이며 회개를 수반한다. 회개는 속죄제에서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죄를 자백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죄 없는 짐승의 죽음은 제사를 드리는 자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상한 심령을 일으킨다. 이처럼 회개란 죄가 없으신 주님께서 내 죄로 인해 죽으셨다는 사실에 애통해하고 죄를 슬퍼하고 자백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며 용서해 주실 때 나의 죄가 사해지는 것이요 죄를 사함 받으니 정결케 되는 것이다. 정결은 다른 방도로는 얻을 수 없으며 회개만이 정결함에 이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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