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가이드

기도원 문화의 명암

이원범 2020. 2. 18. 18:41

한국에는 전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독특한 기도원 문화가 있다. 기도원은 간절한 기도 제목이 있거나 신앙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찾는 장소로서, 연중 휴무이며 매일 수차례 예배가 드려진다. 그리고 늦은 밤까지 기도 소리가 이어진다. 예부터 목회자로 소명 받은 사람은 꼭 방문하는 필수 코스로 여겨졌고, 나름 목적을 지니고 방문하는 교인이 많았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한적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면 하계·동계 수련회로 인기가 있다.

기도원이 처음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자유를 빼앗긴 한민족의 애환이 녹아있다. 일제시대 당시 어떤 기독교인은 일제의 악랄한 탄압을 피해 산중 깊은 곳에 움막을 짓고 개인 기도 처소로 삼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북한 지역에 백산 산성기도처, 정주 오고동의 약수터기도처, 서울 삼각산기도처 등이다. 당시 상황에서 종교적인 장소로 보이면 위험하기 때문에 시설도 별거 없는 그냥 기도만 하기 위한 장소였을 것이다.

이러한 기도 문화는 해방 전후를 시작으로 꾸준히 지속·발전되어 지금 현재로 이어진다. 그러나 아쉽게도 90년대를 기점으로 뜨겁던 분위기는 다소 누그러진 상태다. 80, 90년대에 정점을 찍고 이제는 하락세로 접어들었다. 왜 그렇게 된 건지 이유야 정확하지 않지만, 객관적인 시각에서 볼 때 기독교의 성장이 정체되고 있는 상황과 맞물려 있는 것 같다.

또한 과거 카리스마적 사역자로 교계에 큰 영향을 미치던 주의 종들이 퇴진하고 뒤이을 인재가 없었던 이유인 것 같다. 또 한편으로 몇 기도원들이 신학과 은사론에 관해 주요 교단으로부터 이단 시비를 받고 있다. 은사의 진위 여부도 판단받는 중이다. 그로 인해 재정이 악화된 기도원이 할 수 없이 문을 닫는 상황이다.

기도원 문화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입장

◎ 첫 번째, 은사가 종결됐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은사가 사도 시대 이후로 끝났으니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기도원에서는 병 고침, 축귀, 예언, 방언 등 은사를 활용하는 사역을 행한다. 그러니 고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은사 종결을 외치는 사람은 무슨 기적이 일어나도 믿을 생각이 없다. 예수님 시대에도 꽉 막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눈 앞에서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도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능력을 행하셔도 떨떠름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하물며 오늘날의 사역자들이 그들의 배타적인 시각에 좋게 보일 리 없다.

◎ 두 번째, 은사가 여전히 존재함을 믿지만 과거 기도원의 행보에 실망했거나 나쁜 인식을 갖게 된 부류다. 사람의 마음이란 첫인상에 좌우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한 번 좋지 않았던 감정은 쉽게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아쉬운 점은 실수가 없는 사람이 없듯 모든 일에 문제가 안 생길 수 없다는 것이다. 잘못된 은사 활용의 예는 사도 시대에도 찾아볼 수 있다. 어느 은사자의 교만과 자기 과시가 모든 은사자의 문제로 확대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신학계는 비판에 앞서서 은사에 관한 부정적인 시각을 버리고 보다 실제에 가까운 은사론을 정립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부정확한 은사론은 사역자의 신학 부재로 이어지며 몇 기도원의 사례에서 나타나듯 은사 사역의 잘못된 행태를 야기할 수 있다.

기도원의 필요성

예전에 비해 많이 줄었다지만, 기도원을 향한 발걸음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문제 해결을 위한 간절함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해 아래 새것이 없고 사람의 삶은 어제나 오늘이나 대부분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우리 신앙인의 삶에는 언제나 영적 문제가 산적해 있다. 하나를 넘으면 또 다른 산이 눈앞을 가리며 그것을 넘어도 다시 앞을 가린다.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양상을 보이지만 단순히 말해 모두 죄의 문제다. 성결해지기 위한 과정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말처럼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난관에 직면한 사람은 홀로 감당하기 어려워 도움의 손길을 바란다. 특히 내면의 상처는 스스로 고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깊은 상처라면 감당할 수 있는 사역자가 무척 희귀할 것이다. 좌우간 자신과 가정의 문제, 사업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필요에 의해서 기도원을 찾는다. 그리고 해결이 안 되면 다른 곳을 찾아간다. 어렵고 고달픈 삶을 벗어나겠다는 일념으로 전국을 그렇게 헤맨다.

기도원의 사역자는 교인들의 필요에 적합한 메시지를 전함으로 문제 해결에 갈급해 있는 신자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했다. 은사 활용도 그들의 문제와 직접 연관된 것이었다.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은 병 고침의 은사, 상처나 내면의 문제는 예언과 말씀의 은사로, 축귀는 권능으로 넘어뜨리거나 안찰 등으로 사역을 행했다. 기도가 간절한 사람에겐 방언의 은사를 받도록 도와주었다.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기적은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무수히 많다. 성령께서 치유하시며 기름부음과 구원의 확신이 임하고 소명을 확인하는 등 놀라운 감격이 있었다. 만약 어떤 부작용도 없이 문제가 해결되고 병이 낫고 귀신들림이 고쳐진다면 기도원을 향해 쏟아지는 대부분의 비난은 사라질 것이다. 너무나 아름답고 귀중한 드라마틱한 사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빛이 있는 곳에 그림자가 생기듯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는 기도원에도 짙은 그림자가 존재한다.

잘못된 신학에 근거한 부정적인 면

1) 안찰행위
안찰은 일부 기도원에서 행해지는 기이한 치유사역 방법이다. 용어에는 '누른다, 문지른다' 정도의 의미가 들어있는데 실제 사역에서는 찰싹찰싹 소리가 나게 몸을 때린다. 아픈 것은 당연하고 맞은 곳에 피멍이 들어 한참 동안 멍자국이 남는다. 성경에는 안수기도에 관한 사례는 나오지만 안찰 같은 것은 없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귀신을 내쫓을 때, 때렸다는 기록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떠나라고 했을 따름이다.

그럼 안찰이란 어디에서 나온 걸까? 기독교에서 근거를 찾는 건 무리다. 때리는 행위에서 기독교적 가치가 발현되는가? 성령께서 치유를 베푸시는 일에 구타라는 도움을 받으셔야 하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기독교 기관에서 사용할 수단이 못 된다. 성령의 역사가 임하면 때리지 않아도 얼마든지 치유가 일어날 수 있다. 아무래도 이것은 토속 신앙에서 유래한 것 같다. 우리나라는 무속 신앙의 영향을 오래 받았기 때문에 마음으로는 배척하더라도 몸이 익숙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과거부터 축귀사역은 무당의 전매특허였다. 무당이 벌이는 굿은 춤사위하고 비슷하며 칼을 휘두르고 대나무 채로 귀신 들린 사람을 때렸다. 때리면 아프니 당연히 귀신들이 싫어했을 것이다. 설령 효험이 있다 할지라도 좋은 방법이 아니다. 기독교인이 왜 무당을 따라 하는가? 안찰 여부는 기도원을 택할 때 꼭 확인해보아야 할 사항이다.

2) 가짜 성령춤
성령춤이 성경적인가 아닌가 하는 물음은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성경에 춤을 언급하는 구절이 적은 탓이며, 대부분 예배와 연결 지어진 의미가 아니다. 다행히도 시편 두 곳에서 관련 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

"춤 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춤은 예배에서 찬양과 더불어 하나님을 높이는 수단으로 행해진다. 정결한 하나님의 자녀가 기쁨으로 노래하면서 자유로이 몸으로 기쁨을 표현하는 행위는 바람직한 일이다. 찬양 시간에 율동과 몸찬양을 곁들이는 것이 요즘 교회의 일반적인 추세다. 다만 성령춤은 보통의 춤과는 다른 점이 있다. 내 몸에 어떤 힘이 작용하는 것이 느껴져 그것에 이끌려 전에 알지 못했던 춤 동작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혀가 스스로 움직이는 방언과 비슷한 맥락이다. 그래서 머리로 춤을 알지 않아도 춤을 추는 것이 가능하다. 경험으로 미루어 이것은 사실이다.

일례로 춤을 제대로 배운 적도, 춤을 좋아하던 사람도 아닌 친누나가 팔, 다리, 고개, 손 등을 세세하게 움직이며 다양한 몸짓을 만들어 내는 모습에 굉장히 감탄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의 역사가 아닌 악한 세력의 힘으로도 춤을 출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령으로 말미암은 거룩한 춤이 있는 반면에, 악한 영의 간섭으로 인한 무당 가까운 춤도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어느 쪽에 가까운지 확실하지 않은, 두 가지가 합해진 춤이 있다.

기도원에서는 이것을 분별하여 옳지 못한 춤은 자제시켜야 마땅하다. 악한 영에게 붙들려 춤을 추는 경우 영과 육이 해를 입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를 분별하여 질서를 세워주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춤은 동작이 아름답고 거룩함이 느껴진다. 이것이 구별하는 기준이 되어 경박하거나 요란 법석한 춤은 피해야 할 것이다.

하여튼 성령춤에 관한 내용은 교계에서 민감하게 다뤄지는 부분이기에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이단으로 몰릴 수도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끼리 작은 편견이나 선입관으로 서로 다투고 배척하는 모습은 참 안타깝다. 서로 오해를 풀고 존중해 줄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3) 방언기도에 지나친 몰입
주여 삼창을 외치고 큰 소리로 부르짖는 통성기도는 한국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고유한 특색이다. 특히 기도원에선 기도회를 인도하는 사람부터 방언으로 시작해 섬김이와 대중까지 주로 방언으로 기도한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저마다 간절함을 표출해낸다. 일반인이 보면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진풍경이다.

방언은 사람에게 향하지 않고 하나님께 향하는 말로, 우리의 속사람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다. 성경에 방언하는 사람은 자기 덕을 세운다고 하였으며, 실제로도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유익이 있다. 기도원에서 방언기도를 장려하고 있음은 물론 옳은 일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라면 방언만 강조한다는 것이다. 방언을 하되 방언만 하면 균형을 잃을 수 있기 때문에 우려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사람은 운동으로 몸을 단련할 수 있다. 운동은 심신의 건강과 활력을 유지하는 일에 매우 유익하다. 그런데 운동만 열심히 하지 몸을 전혀 씻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불결한 환경에 계속 노출된다면? 충분히 병에 걸릴 수 있다. 더러움과 불결한 환경은 죄악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속사람이 죄의 질병에서 안전하려면 회개하고 깨끗해져야 한다.

방언과 더불어 회개기도가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더러움을 씻어내는 일에 소홀히 하면 은사가 변질되거나 소멸될 우려가 있다. 만약 방언 은사가 귀신의 방언처럼 변질되었다면 입이 정결치 못하거나 회개가 부족함을 의미한다.

4) 상업성에 치우친 예언 사역
교계에서 예언 사역이 매장당하며 지탄을 받는 이유가 있다. 일부 교회와 기도원에서 가짜 예언자를 초청하여 상업적이고 사기성 짙은 엉터리 예언 사역을 벌여왔기 때문이다. 은사사역 계통에서 예언의 말씀은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분야다. 그 예언자들은 스스로 포장을 잘하여 인생의 어떤 문제라도 해결해 줄 것처럼 자신을 부풀린다. 신령한 능력으로 속의 비밀스러운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가장한다. 미끼를 물고 도움을 청하면 마치 무속인들처럼 돈을 대가로 요구하는 것이 그들의 수법이다.

이러한 가짜 예언자들의 선례로, 교계는 은사의 왜곡된 이미지를 받아들여 은사사역 전체를 비난하게 되었다. 한 번 틀에 박힌 선입관은 쉽게 고쳐지질 않는다. 한동안 교계에서 예언 은사와 계시를 부정하는 가르침이 쏟아져 나왔다. 좋지 않은 선례가 이렇게 파급력이 강하다. 과거의 실수는 돌이킬 수 없다지만 앞으로라도 가짜를 가려내서 비난거리를 만들지 말아야겠다. 예언 사역의 실종으로 교회가 필요로 하는 유익이 줄어들었으니 교회 전체가 입은 손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크다. 무속인처럼 돈을 요구하는 예언은 잘못된 행태다. 진실한 사역자에게서 정직한 은사의 활용을 기대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가 사회적 신뢰를 잃고 세상 사람의 욕을 듣는 작금의 현실에서 영성회복의 필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동안 기독교가 세속 이념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결과, 교회나 기도원은 사업체만큼이나 돈을 밝히며 본질을 무시해왔다. 기도원의 초기 설립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담고 있었을 것이다. 초심으로 돌아가면 얼마나 큰 개선이 이루어질까? 욕을 듣는 기독교가 서글퍼서라도 부디 초심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교회를 비난하기보다 우호적인 협력 관계를 이루는 파트너가 되길 바란다.

기도원은 한국 기독교에 지대한 공헌을 해왔고 가지고 있는 장점도 훌륭하다. 우리의 신앙 선조들이 엎드리기 위해 나아갔던 곳은 허허벌판 광야였다. 광야는 보잘것없는 수목과 바위, 모래와 같은 관심 가는 요소가 거의 없는 땅이다. 광야 같은 환경은 아니지만 기도원은 충분히 하나님께 집중하기 좋은 환경이다. 기도원이 성도의 영성훈련을 책임져 준다면 교회의 회복도, 기독교가 옛 위상을 되찾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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