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는 구약의 마지막 계시를 전한 선지자입니다. 때는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재임하던 시절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대략 1차 귀환 이후 100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이후 400년간은 계시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역사의 분기점으로서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쯤이면 선지자가 좋은 일로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충분히 아실 것입니다. 이번 이스라엘의 문제는 영적 태만입니다. 사람 간의 관계로 비유하면 권태기에 빠진 연인과 비슷합니다. 본서에서 이스라엘은 금방이라도 이별을 고할 것처럼 권태에 빠져있습니다. 서두에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시는데 그들은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고 반문합니다. 이 같은 반응에서 그들이 얼마나 틀어져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관계란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신뢰가 무너지면 그 관계는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상대를 믿어줘야 합니다. 자신도 상대의 신뢰만큼 행동으로 보답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인지라 상대의 신뢰에 화답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자꾸 의심이 들고 의심이 가중되면서 상대를 옥죄고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이 태만에 빠진 데에는 그런 연약함이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들을 위로하고 좋은 날을 기대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더 나아지는 것이 없었습니다. 약속이 현실화되지 않는 데서 오는 실망은 그들의 신앙을 태만하게 만들었습니다. 탈력감에 빠진 삶을 살게 했습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마음을 다하지 않고 십일조나 예물에 대해서 신실하지 않았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들 자신도 실수를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기력하여 바로 잡을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항의하는 수단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말라기는 노한 감정을 담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태만에 빠진 그들의 잘못을 꾸짖고 죄에는 심판이 따른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들이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을 전달하였습니다. 회개하고 각성하도록 촉구하였습니다. 복이 오지 않아서 실의에 빠진 것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정당하다고 여긴다면 큰 문제입니다.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그것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기다리며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의심이 들면 의심한 죄를, 조바심이 들면 조급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불평불만이 올라오면 불평불만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은 악한 영이 일으키고 죄이기 때문에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한편, 이스라엘이 복을 받지 못한 데에는 자신들에게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원인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복을 안 주신다고만 생각했지, 자신이 복 받을 만한 사람인지는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알았더라면 하나님께 더 잘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고 있었습니다.
요지는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하고 신실해야 합니다. 본서는 주로 헌금에 관한 설교에 자주 등장하는데, 십일조나 예물은 각자 형편에 따라 드리면 됩니다. 많이 드릴수록 좋아하신다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적으로 부족하여 인간의 도움을 받으셔야 하는 분이 아닙니다. 가능하면 예물을 준비할 때 주님께 여쭈어보고 응답대로 드리면 좋을 것입니다. 사람마다 때에 따라 형편이 다른데 그것을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를 내라고 하시면 그대로 드리는 것이 정답입니다. 형편이 어려워서 못 드리는 경우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 강병도 편저, 「호크마 주석」, 기독지혜사
- 노우호, 「읽는 것을 깨닫느뇨?」, 에스라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