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호르 주석

마태복음 23

이원범 2024. 3. 2. 18:05

23:1~39 종교 지도자들의 죄악상을 고발하며 화를 선포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타락 중에서도 지도급 인사의 타락은 심각한 사안으로 취급된다. 이는 높은 지위인 만큼 사회적 파급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입에서 욕이 나올 정도면 그들의 죗값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미 전에 경고가 주어졌고(3:7~10, 12:34~37), 계속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면 멸망밖에 받을 것이 없다. 더불어 그들의 죄악이 가득 들어찬 예루살렘은 처참히 무너질 것이다.

23:2 sit on Moses' seat. 율법을 다루고 해석하는 일에 있어서 그들이 갖는 권위를 표현한 말이다. 다만 자질을 논한다면 그들은 그 자리에 합당하지 않다.

23:4 율법주의에 대한 신학적 해설 참조.

23:5 phylacteries. 성구가 든 작은 상자인데 이마 위에 두르거나 왼팔에 감아서 착용한다. 히브리어로는 '테필린'이라고 부르며, 신 6:8에 대한 문자적 순종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23:8~10 언급하신 호칭을 사용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경계해야 할 점은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려는 교만과 계급 의식이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교사나 지도자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직분일 따름이지 우두머리의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늘 겸손한 자세로 사역에 임해야 한다.

23:13 hypocrites. 6:2 해설 참조. shut the kingdom.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더라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말씀이다. 위선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자신과 같은 위선자를 양산할 따름이다(롬 10:2, 3). 바른 가르침의 중요성이 여기서 대두된다. 이스라엘의 불신실한 목자들은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고, 양 떼는 목자 없는 양처럼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9:36).

23:15 hell. 5:22 해설 참조.

23:16~22 맹세의 대상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는 모순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기 꺼렸던 유대인은 그보다 하위에 속한 대상에 맹세하는 관습을 가지게 됐다. 그리고 무엇에 대고 맹세하느냐에 따라 어겨도 괜찮고 혹은 안 되는 불합리한 차등이 생겨났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맹세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5:37). 맹세했으면 허투루 행하지 말고 제대로 지켜야 죄를 면한다.

23:23 여기서는 지나치게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쓰면서 정작 근본적 원리를 저버리는 모순을 짚으신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십일조는 소득의 1할을 드리는 것인데, 이들은 너무 지나치다 싶은 모습을 보인다. 반면 어려운 형편에 놓인 이웃을 긍휼히 여기거나 의를 실천하기는 싫어했다(신 10:18, 19, 14:29).

23:24 gnat . . . camel. 부정한 짐승 중 하루살이(아람어로 '칼마' 또는 '캄라')는 크기가 가장 작고, 낙타(아람어로 '감라')는 가장 크다. 레 11:23에 유의하여 하루살이를 음식에서 제하지만 낙타는 삼키는 자라고 지적하시는 것이다.

23:35 Abel. 역사상 처음으로 벌어진 살해 사건의 피해자다. 그의 의로움이 히 11:4; 요일 3:12에 묘사되어 있다. Zechariah. 스가랴서의 기록자 '스가랴'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그가 순교했다는 기록이 없어서 학자들은 다른 후보을 거론하기도 한다. whom you murdered. 의인이 악인의 손에 살해당하는 안타까운 현실은 시대마다 되풀이된다. 그리스도께서 대적자의 손에 넘겨질 날도 머지않았다.

23:36 종교 지도자들이 지은 죄악은 때때로 국가적 차원에서 보응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이 세대'가 경험한 형벌은 로마와의 항쟁(제1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수많은 인명이 죽고 예루살렘이 폐허로 변한 것이다.

23:37 진심이 우러나오는 외침 속에서 부모의 말에 계속해서 불순종하고 집을 뛰쳐나간 자식의 심상을 떠올릴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부분에서 매우 슬퍼하고 계신다. 자녀가 망하기를 바라는 부모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요 3:16).

23:39 you will not see me again, until. 주님을 볼 수 없다는 것은 가장 큰 기쁨을 누리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에게 복을 내리시는 만복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다시 주를 뵈려면 지난날의 과오를 회개하고 주 앞에 무릎 끓어 경배해야 할 것이다(계 7:10, 14).

'타호르 주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태복음 25  (0) 2024.03.02
마태복음 24  (0) 2024.03.02
마태복음 22  (0) 2024.03.02
마태복음 21  (0) 2024.03.02
마태복음 20  (0) 2024.03.02